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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대한 고뇌와 집념으로 펼쳐놓은 확장의 증거 우정수

솔리스톤1 2019. 1. 24. 21:57

 

확장의 증거, 우정수
크기를 가늠할 수 없고 사나움을 드러내지 않은 검은 바다, 그 앞에 한 화가가 조그맣게 서 있다. 거친 잉크 선이 만들어낸 바다는 불안과 공포가 압도하고 있는 ‘현실’이다. 미미한 존재의 화가는 그 막막함을 캔버스에 담으려 한다. 우정수의 드로잉 <그림 그리기> 시리즈의 한 장면이다. 쓱쓱 그려낸 드로잉 속에서 예술가로서 자기고백과 일상의 공포,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어떤 힘에 대한 도전 등이 다양하게 읽힌다. 우정수는 현실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불안과 광기를 꾸준히 다뤄왔다. 첫 개인전 <불한당의 그림들>에서는 황우석 사태나 휴거 소동처럼 세기말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지난해에 열린 개인전 <책의 무덤>에서는 단단한 권력 앞에 갈 곳을 잃은 지난날의 시간을 들려줬다. 올해 서울시립미술관 신진미술인 전시지원 작가로 선정된 우정수가 갤러리 룩스에서 8월 6일까지 작품을 선보인다. 전시 제목은 <산책자의 노트>. 전시장 한 층에서는 난파선과 대왕오징어, 성모마리아와 신화 속 동물이 만들어낸 흑백의 카오스가 시선을 붙잡고, 다른 한 층에는 드로잉으로 흘러나온 생각의 조각들이 한 권의 책처럼 담겨 있다.

 


<산책자의 노트> 전시를 소개하면 앞으로의 내 작업 방향을 보여주는 신작 회화들과 기존 드로잉 작업들을 망라해서 보여준다. 2010년부터 지속해 온 드로잉은 사회에 대한 생각과 태도들을 내 방식대로 기록한 이야기들이다. 지난해까지의 이야기는 좀 무거웠는데 올해 초 사회가 변하면서 조금 더 가볍게 작업했다. 앞으로 담을 이야기들도 달라질 것이다. 그러려면 내가 해온 이야기들을 정리해야 했고, 170여 점의 드로잉들을 책으로도 엮었다. 
작업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변했나 20대는 늘 집회에 참석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문제는 그대로인데 사람들은 왜 이걸 고치지 않고 엉뚱한 데 화를 낼까’라고 늘 의아해했고, 분노했다. <책의 무덤>은 인간에 대한 회의를 기반으로 했다. 인류가 축적해 온 문화와 지식이 현실에서 작동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도서관이 무너져 내리고, 배가 난파되면서 인류의 유물과 책들이 표류하는 그림을 그렸다.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한 채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은 개인의 욕망 탓이라고 봤다. 그런데 요새 ‘긍정’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됐다. 긍정에도 다양한 깊이가 있다는 것을 탐구하고 있다. 
‘자기 꼬리를 먹는 뱀’을 모티프로 한 대형 회화 ‘우로보로스’ 시리즈를 선보였다. 어떤 생각의 변화가 반영됐나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우로보로스는 자기 몸을 먹어가면서 몸집을 키우는 뱀이다. 처음에는 자신을 파괴하는 존재에서 폭력성을 떠올렸다. 그런데 대선 결과를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돌고 도는 순환 그리고 확장해 가는 세계로 이야기 방향을 잡았다. 
드로잉들을 <산책자의 노트>라는 책으로 엮었다. ‘엉터리 화가’ ‘바보들의 왕관’ 등 8개 챕터로 구성했는데 작업 과정은 어떻게 이뤄졌나 항상 강박적으로 책을 읽었는데 드로잉은 독서와 일상에서 얻은 정보와 경험이 축적되면서 자연스럽게 나온다. 초반의 드로잉들은 종이를 펼치고 펜을 잡으면 즉각적으로 이미지가 나왔다. 신기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이후 3년간은 기존에 그렸던 이미지들을 분석했고, 레퍼런스를 찾고, 제목을 어떤 걸로 할지 고민했다. 이야기가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 일정 분량은 추가로 그리는 과정을 반복했다. 
신화나 고전에서 영향받은 소재가 많아 보인다 이야기의 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은 종교다. 종교라는 것은 일종의 판타지인데 현실에 엄청나게 영향을 미친다. 신화도 마찬가지다. 이야기라는 게 상상력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림 그리는 것에 회의가 든 적 있나 4년 전 개인적으로 힘든 일 때문에 미술을 그만두려 한 적 있다. 그때 유럽을 가게 됐는데, 산책하면서 프랑크푸르트 슈타델 미술관에 갔다. 중세의 고전회화들이 가득한 전시실에서 ‘나를 100% 이해해 주는 친구와 같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림을 보러 갈 때면 외로움이 덜어졌고, 작업을 계속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작업 태도를 닮고 싶은 작가는 독일 작가 요르그 임멘도르프의 작업을 좋아한다. 그가 사회현상, 그 안의 인물들을 다루는 방식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요즘에는 데이비드 호크니에 관심이 많이 간다. 그의 성실함에 감동하고 있다. 나는 그림 그리는 게 좋을 때도 있고, 진짜 싫을 때도 있다. 나도 그처럼 꾸준히 즐겁게, 재미있게 작업하고 싶다. 
원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