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리이야기/창업·성공전략·부자되기

10억을 모은 사람들

솔리스톤1 2007. 5. 31. 15:06
무일푼에서 7년간 10억원 모은 샐러리맨 A씨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6만원짜리 자취방. 한달에 25만원으로 살아가는 고시생. 회사원 A씨의 1996년 초 생활 모습이다. 지방 출신인 그는 고등학교 때 집안이 기울면서 ‘눈물 겨운’ 서울의 대학 생활을 보냈다. 달랑 1천원으로 열흘을 버틴 적도 있었다.

약 7년 후인 2003년 1월 그의 모습은 이렇다. EF소나타를 모는 강남의 33평형 아파트 거주자. 부동산 자산 8억5천만원, 주식 8천만원, 현금 1억여원 등 총 10억원 이상의 자산가.

운 좋게도 99년∼2000년 증시 활황과 2002년 부동산 시장 상승세를 제대로 탄 덕이 크다. 하지만 노력하는 사람만이 기회를 잡는 법이다. 올해 서른다섯의 A씨의 ‘10억원 모으기’는 20대부터 시작된 ‘살인적 지출봉쇄’에서 출발한다.

‘가난’은 재테크의 스승

1996년. 그는 고시의 꿈을 접고 취직한다. 당시 그가 회사를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잠재력이 큰 첨단 업종 그리고 주택자금 1천만원 무이자 대출을 해주는 회사라는 점이었다. 그는 집에서 보태준 5백만원을 얹어 1천5백만원짜리 옥탑방 전세를 얻었다. 그리고 맹목적 저축에 돌입했다.

입사 당시 그의 기본급은 월 75만원. 세전(稅前) 연봉이라야 1천8백만원 정도였다. 그 중 95%를 저축했다. 이를 위한 수칙, 첫째 회식은 절대 빠지지 않는다, 둘째 저녁식사가 해결되는 야근은 되도록 많이 한다. 물론 열심히 일해서 회사에서 출세하겠다는 다짐도 한몫 했다.

이듬해인 97년, 그는 우리사주 5천주를 매입했다. 후에 종잣돈이 돼 준 투자였다. 한 해 뒤인 98년, 그는 ‘종자 철학’을 다질 기회를 맞는다.

“부동산 계약·권리 분석·채권회수 업무를 맡게 됐죠. 채권회수 때문에 분당지역의 아파트 등기부등본을 열람하는데 70∼80%가 집을 담보로 빚을 지고 있더군요. 등기부등본이 깨끗한 집은 20%가 채 안 돼더라고요.”

그는 빚쟁이들일수록 생활이 호화롭고 실속 있는 부자들은 오히려 검소하다는 점을 체득했다. 사시준비 시절 얻은 법률지식에 부동산 실물 공부가 맞물리면서 부동산 안목을 상당한 수준으로 끌어올린 때이기도 하다.

99년 4월 그는 가정을 꾸렸다. 결혼 직전 그는 신부와 함께 동원 가능한 총 재산을 계산해 봤다. 7천8백만원이었다. 그 돈으로 28평짜리 번듯한 아파트를 전세로 얻었다. 가계약을 하고 집에 돌아온 A씨는 곰곰 생각했다.

‘전 재산을 전세금으로 털어 넣으면 앞으로 무슨 돈으로 재테크를 하지? 결혼하면 예전처럼 무식하게 저축하기도 어려울 텐데?’

다음날 A씨는 신부에게 “행복을 연기하자”고 제안했다. 나중의 더 큰 행복을 위해 지금 검소하게 출발하자는 얘기였다. 그래서 둘은 A씨가 살던 전세금 2천5백만원짜리 잠실 13평 아파트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한다.

혼수는 싱글 침대를 대신할 더블침대가 전부. 대신 나머지 돈으로 주식투자에 나섰다. A씨에게는 장외시장에서 눈여겨봐 뒀던 종목이 있었다. 강원랜드였다. 내국인이 유일하게 출입가능한 카지노는 ‘반드시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종잣돈이 모이면 내집부터 마련하라

‘잘 아는 우량주식 1∼2종목에 집중한다.’ 그가 주식투자에서 지키는 원칙이다. 그의 재테크 원칙이 또 하나 있다. ‘어느 정도 종잣돈이 모이면 내집 마련부터 한다.’ 그래서 그는 결혼하던 해 송파구에 있는 아파트 분양권을 매입했다.

편의시설·접근성·자연환경·교육 등 모든 면에서 서울시내에서 송파구의 잠재력이 가장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33평형 아파트를 분양가 2억2천5백만원에 프리미엄 2천5백만원을 얹어 2억5천만원을 주고 샀다.

“중도금을 내려면 갖고 있던 주식의 일부를 중간 중간 팔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행운이었죠. 계속 갖고 있었다면 주가 급락으로 손해를 봤을 겁니다.”

2001년은 그가 본격적인 재테크 공부를 시작한 해였다. 부서를 옮기면서 시간 여유가 좀 생긴 덕이었다. 당시 그의 관심은 부동산으로 옮겨갔다. 그동안 그의 주식투자는 ‘우리사주나 장외시장 매입·공모주 청약’으로 제한돼 있었다.

본격적인 자본시장 데뷰 이전에 투자해야 높은 수익률을 올릴 확률이 높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2001년은 이미 장외시장도 한물 가고, 증시도 싸늘히 식은 때였다. 그래서 주식은 한풀 접고 부동산 정보 수집에 집중했다. 주말이면 관심지역에 직접 가서 현장조사도 벌였다. 그런 그에게 2002년부터 부동산 상승기라는 ‘감(感)’이 왔다.

그 해 7월, 그는 잠실에 14평형짜리 시영 아파트를 2억8천만원에 사들였다. 매각대금 마련을 위해 갖고 있던 강원랜드 주식도 팔았다. 시세차익은 5배나 됐다. 현재 그가 살고 있는 송파구 아파트는 5억원, 잠실 아파트는 3억5천만원에 이른다.

아파트 차익만 총 3억3천만원이나 본 셈이다. 여기에 그동안 금융기관에 모아 둔 돈이 1억여원에 달한다. 그는 지금도 매년 최소한 3천만원 이상씩을 저축한다. 그의 연봉이 세전 5천만원쯤 되는데다 투자수익까지 합치면 그 정도는 가능하다. 맞벌이인 아내의 월급도 상당액이 ‘통장행’이다.

그런 그가 요즘 반성을 많이 하고 있다. 현재 아내·딸과 함께 세식구가 살기에 33평은 너무 ‘호화로운 게 아닌가’ 해서다. 그래서 좀더 싼 아파트로 이사가는 방안을 고려 중이다. 그의 가족이 요즘 쓰는 한달 평균 생활비는 약 3백만원이다.

그 중 보모비 등 두살배기 아들에게 90만원쯤 들어가고 실 생활비는 2백10만원인 셈이다. 이처럼 생활비가 늘어난 것은 2000년 1단계 재산 불리기가 마감되고 지난해부터는 2단계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안 쓰고, 안 먹고, 무조건 모으는 게 1단계죠. 총자산 10억원 가까이 되면서 1단계는 마무리됐습니다. 이제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도 돕고, 외식도 하고 1년에 한번 해외여행도 가기 시작했습니다.”

진정한 지혜는 고생에서 나온다

이제 그는 2단계에 들어갔다. 2단계는 돈을 버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 A씨는 요즘 상가에 관심이 많다. 저평가돼 있는 상가를 발굴, 리모델링으로 부가가치를 높여 임대하는 방식을 연구중이다.

‘투자에서 벌어들이는 소득이 급여소득을 초과하는 상태’가 5년 중기목표다. 40대는 ‘1백억원’을 모은다는 야심도 갖고 있다. “5백만원으로 시작해 7년여 만에 2백배 이상 불렸으니 10억원의 10배인 1백억원 만들기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자신한다.

3단계 목표도 있다. 50대에 천억원대의 재산을 모아 사회사업을 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가슴 아픈 사연이 하나 있다. 고시공부에 매달려 힘겹게 살던 대학시절, 한 방에서 고생하던 동생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그 때 이렇게 결심했단다.

“동생 몫까지 농도 짙게, 행복하고 그리고 뜻있게 살겠다.” 그래서 그는 돈도 많이 벌고, 죽기 전에 ‘진하게’ 사회환원도 하고 싶다.

그는 자신의 재테크 최대 성공요인으로 운(運)과 함께 ‘대학시절의 가난’이라고 말했다. 그날 A씨와의 인터뷰 장소 엘리베이터에는 ‘진정한 지혜는 고생에서 나온다’는 격언이 붙어 있었다.

 

A씨의 10억 만들기

1996년

1천5백만원.취직. 회사의 1천만원 무이자 대출+자기 돈 5백만원으로 출발. 세전 연봉 1천8백만원 중 95% 저축

1997년

5천5백만원(대출 3천만원 포함) 회사로부터 무이자 대출받아 우리사주 5천주 매입.

1998년

1억5천만원(대출액 총 4천4백만원,아내 결혼자금 약 4천만원 포함) 연초 장외시장에서 회사 주식 추가 매입. 결혼자금 7천8백만원으로 강원랜드 등 장외시장 우량주 매입. 10월 송파구에 2억5천만원에 33평형 아파트 분양권 매입.

2000년

3억원(부채 청산) 회사 주식 등 일부 주식 매각으로 4~5배 차익 실현. 일부 중도금 내면서 주식 매각 매입 반복.

2001년

4억원. 일부 주식 매매로 차익 실현. 재테크서 탐독 및 부동산 본격적인 연구 시작.

2002년

6억5천만원. 부동산 시장 집중조사.7월 잠실 14평형 아파트 2억 8천만원에 매입. 강원랜드 주식 매각으로 5배 차익 실현. 5년짜리 비과세 저축 만기로 3천만원 목돈 마련.

2003년

약 10억원. 아파트 2채 시가 8억3천만원. 보유 주식 시가 8천만원.현금 1억원.

*7년간 약 10억원=저축 1억원+주식 시세차익 5억5천만원+부동산 시세차익 3억3천만원. 

 

10억대 샐러리맨 A씨가 말하는 재테크 원칙

첫째, 직장생활 첫 3∼5년은 무조건 저축하라. 되도록 젊은 시기에 빨리 승부를 내고, 돈 버는 시스템을 구축해 놓아야 한다. ‘빨리’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숫자를 보면 확연하다.

‘60세까지 10억원 모으기’를 20세에 시작할 경우 매월 69만원씩 저축하면 된다(금리 5% 가정). 40세부터 시작하면 무려 2백52만원씩 매달 저축해야 가능하다.

돈을 벌기 시작하는 직장생활 첫 3∼5년 사이 되도록 결혼 전에 최대한 허리띠를 졸라매는 저축을 해야 한다. 이 동안 3∼5천만원의 종잣돈을 모아라. 결혼하고 특히 애까지 생기면 ‘악착 같은 절약’에도 한계가 있다.

둘째, 내집 마련이 최우선이다. A씨는 생애 첫 승용차를 취업 5년차인 2000년에 샀다. 내집 마련을 끝낸 후였다. 그가 내집 마련을 최우선으로 꼽는 이유는 이렇다. “부동산은 웬만하면 10% 이상 떨어지지 않습니다.

떨어져도 복원력이 큽니다. 특히 부동산 주기인 10년을 내다보고 살 집에 투자하면 주식 등 다른 어떤 자산보다 안정적인 투자 대상이죠. 게다가 부동산에 묻어두면 돈을 헛되게 쓰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셋째, 정보를 입체적으로 수집하라. A씨는 자신의 성공 요인 중 하나로 ‘뉴스 읽기’가 취미라는 점을 꼽는다. 그는 신문·잡지·인터넷을 통해 뉴스를 읽고 정보를 모으는 것을 즐긴다. 읽으면 생각하고, 관심이 가면 실사한다.

독서는 한 달에 한 권꼴로 한다. 그냥 읽는 게 아니라 ‘탐독’한다.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는 총 6권을 모두 3번씩 읽었다. 재테크책은 기술보다 ‘철학’ 책을 읽는다. 테크닉은 상황에 따라 다르고, 빨리 변하는데다가 전문가를 활용하면 된다. 하지만 돈에 대한 태도와 철학·마음가짐은 스스로가 제대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그는 활자를 통해서만 정보를 얻는 게 아니다. 현장답사를 통해 살아 있는 정보를 수집한다. 그는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관심 있는 땅을 보러 다닌다. “예컨대 청계산에 가서 좋은 공기 마시고, 토속음식 먹고, 주변 부동산에서 정보도 얻습니다. 때로는 길가는 아주머니에게 주변시세를 묻습니다. 그만큼 생생한 정보가 없거든요.”

넷째, 씨앗을 많이 뿌려라. 씨앗을 10군데 뿌리면 1∼2군데라도 수확을 거둘 수 있다. 하지만 씨앗을 뿌리지 않거나 한두 군데만 뿌리면 아예 거둘 수조차 없다. “그 어떤 재테크도 절대선(善)은 없습니다. 10번 투자해 2번 성공했다면 아주 훌륭한 겁니다.

대개 그 성공 20%에서 대박이 터지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A씨도 주식투자로 몇 천만원씩 손해 본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실패 없는 성공은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보고 눈앞의 이익이나 손실에 안달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다섯째, 아는 것에만 투자하라. A씨는 제아무리 유망한 투자처라고 해도 자신이 모르는 곳에는 절대 투자하지 않는다. “제가 생활하는 지역의 반경 1㎞ 내에 주로 투자처를 물색하죠.” 주식을 할 때도 자신이 몸담고 있는 주변 업종의 우량주식 1∼2종목에 집중했다.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다. 일단 종목을 찍으면 바로 투자하지 않는다. 얼마간 관심 있게 지켜본다. 종목을 볼 때 기준은 두 가지다. 첫째 캐시카우가 있는 회사인가, 둘째 도덕성이 좋은가다. 평판은 그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회사가 어떤지 물어본다. 장기투자를 할 때 이 두 가지를 지키면 실패율이 최소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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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을 모은 사람들(2)]사람을 잘 사귀는 것도 재테크


4년만에 10억 번 샐러리맨 김필수씨의 투자기


음식맛은 ‘손맛’이란 얘기가 있다. 분명 똑같은 조리법대로 했는데도 초보주부의 음식맛은 어딘지 허전하기 십상이다. 투자에도 손맛이 있다.

같은 원칙과 공식을 따라해도 투자자마다 결과는 다르다. 투자시점과 배합의 그 미묘한 차이가 투자의 맛을 가른다. 김필수(가명)씨의 투자솜씨는 제대로 된 조리법에 손맛까지 얹은 품이다. 물론 실패를 통해 단련된 손맛이지만 말이다.

그는 대학 졸업 석달 전인 1990년 말 한 대기업 계열사에 입사했다. 회사에 들어간 후부터 당시 월급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월 30여만원을 꼬박꼬박 저축했다. 그런데 그 용도가 좀 색달랐다. 결혼자금 마련이 아니라 ‘주식투자 자금’이었다. 대학시절부터 주식에 관심이 많았던 실전 주식투자를 위해 월급으로 종잣돈을 모은 것이다. 돈 벌 욕심보다는 주식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 출발점이었다. 서울의 중산층 가정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는 덕에 자신이 모은 돈은 모두 주식투자에 쓸 수 있었다.

첫 투자로 모은 돈 다 날려

입사 이후 5년여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월급이 모이면 투자하고, 잃으면 또 월급을 모으는 일이 반복됐다. 매달 12만원씩 부어 3년만에 탄 재형저축 5백만원도, 월 18만원씩 역시 꼬박 3년을 모은 근로자증권저축도 증시가 삼켜버렸다.

그는 이 기간동안 “참 비싼 수업료를 냈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빚을 내서 투자한 적은 없었다. 그러던 중 96년 5월 주가지수 선물, 97년 7월 옵션 거래시장이 개설되면서 그의 재테크 인생은 계기를 맞는다.

그는 선물시장이 개설된 96년 하반기 5백만원으로 선물거래에 뛰어든다. 1년 후 옵션거래도 개시했다. “새로운 투자라서 호기심이 갔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했죠. 원론 책을 보면서 1년여 독학을 했습니다.

틈틈이 관련 강좌도 다니고요. 잔재주보다는 주로 상품구조를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때도 돈이 최우선 목적은 아니었어요. 워낙 금융투자에 관심이 많아 배워보고 싶었죠.”

그후 속칭 IMF시대로 불리는 경제위기 때 짭짤한 재미를 봤다. 증시 대세 하락기에는 투자자들도 손해볼 수밖에 없는 주식투자와는 달리 선물 옵션은 주가 하락기에도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약 2년여만에 1억원을 벌어들였다.

그가 선물 옵션시장에서 한창 승승장구하던 98년 6월, 주가는 280선까지 곤두박질쳤다. 그는 ‘이 정도면 거의 바닥에 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식시장으로 서서히 발길을 옮겼다.

그 후 99년 6월 종합주가지수가 850선에 이르는 1년여 동안 또 다시 3배 이상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선물 옵션 투자도 일부 병행했다. 그가 선물 옵션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은 2000년부터였다.

“내 경우 선물 옵션으로 종잣돈을 모은 셈이죠. 그런데 선물 옵션은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오랫동안 가져갈 투자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자산이 모인 다음에는 중단했죠.”

그는 투자 삼분법으로 불리는 주식·채권·부동산 전방위로 돈을 불렸다. 98년 IMF 구제금융 신청 이후 수익률이 20%대를 넘었던 회사채 등 일부 채권 상품에 투자해서 짭짤한 재미를 봤다. 그가 아파트를 산 시기는 99년이었다.

그는 주식에는 전문가 수준이지만 부동산에는 거의 문외한이었다. 샐러리맨이 주식·부동산·채권을 모두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신 그에게는 친하게 지내는 부동산 전문가가 있다.

가끔씩 술 한잔하면서 자신은 금융정보, 상대방은 부동산 정보를 맞교환하곤 했다. 그가 아파트에 투자한 것도 그 친구의 조언 덕이었다. “지금 아파트값이 지나치게 떨어졌으니 무조건 사라고 하더군요. 평소 알고 지내던 친구라 거의 1백%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의 조언을 그대로 믿고 급매물로 나온 아파트를 한 채 샀죠."

사람을 잘 사귀는 것도 재테크

당시 매입가는 2억원. 전세를 끼고 샀기 때문에 실제 투자된 돈은 1억원을 조금 넘었다. 그 아파트의 시세가 지난해 4억원을 돌파했다. 아무래도 과열되는 느낌이었다. 정부에서도 부동산 시장을 잡겠다고 각종 정책을 쏟아내는 판이니 부동산 시장도 상투에 왔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지난해 말 팔아치웠다. 매도가는 4억2천만원. 2배이상의 차익, 실제 투자금액을 기준으로 보면 4배 정도 수익을 본 셈이다.

그는 지금도 무주택자다. 지난 95년 결혼한 이후 죽 전세를 살고 있다. 아이가 학교 갈 때까지는 내집마련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 물론 좋은 기회만 있다면 ‘재테크’로서의 구입은 계속할 것이다. 다만 당분간은 부동산도 ‘내집마련’의 차원이 아니라 ‘가장 합리적인 투자처’ 중 하나일 뿐이다.

이렇게 재테크로 승승장구한 그지만 정말 독특한 게 있다. ‘목표 수익률’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주식투자를 하든, 채권을 하든, 부동산을 하든 얼마 정도 수익을 올리겠다는 목표를 정하지 않는다.

“돈을 그냥 현금으로 들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뭔가 투자를 해야 하는데, 지금 당장의 현실에서 어떤 투자처가 가장 유리한가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금리가 더 높은가, 증시의 수익률이 더 높은가 하는 식으로 가장 합리적인 투자처를 비교해 보는 거죠. 사전에 얼마를 벌겠다는 식의 목표는 없습니다.”

그의 비교 기준은 금리와 주가의 ‘기대수익률’. 주식시장 기대수익률 계산법은 1을 예상 PER(주가수익률)로 나누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올해 예상 PER(주가수익률)이 7∼8%, 즉 주가가 주당순익의 7∼8배 가격으로 거래될 전망이라고 치자.

1을 7∼8%로 나누면 13∼14%가 된다. 현재 예금금리는 대개 5% 내외. 그러니 당연히 주식시장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그는 최근 주식투자 비중을 대폭 끌어올렸다. 현재 그의 포트폴리오는 주식 60%. 은행 금융상품의 이자율은 워낙 낮아 한푼도 투자하지 않는다. 대신 어음관련 상품에 20%를 넣어뒀다. 나머지 20%는 현재 살고 있는 전세금이다.

그는 증시에서 투자 종목을 선택할 때도 깐깐하게 조건을 따진다. 그가 정한 세 가지 조건을 두루 갖춘 종목만을 엄선한다. 3대 조건 중 첫째는 이익이 나는 회사다. ‘잠재력’ 운운은 그의 앞에서는 헛소리다. 반드시 이익이 나는 회사여야 한다.

둘째, 배당을 주는 회사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금리 이상의 배당을 주는 회사에만 투자한다. 주식시장의 예상 수익률이 금리 이상이어야 주식투자를 결정하는 것처럼 개별 종목에서도 최소한 금리만큼의 수익은 보장돼야 움직인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1만원짜리 주식을 샀는데 5백원 배당을 준다면 연간 5% 금리의 금융상품에 투자한 만큼의 수익은 확보된 셈이다. 하지만 주가가 2만원을 뛰었는데 배당금을 5백원 준다면 김씨는 이 주식을 매각한다.

주가 대비 배당률이 2.5%로 줄어들어 금리보다 훨씬 뒤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 최우량 종목으로 꼽히는 삼성전자 주식도 사지 않는다. 배당을 안 주기 때문이다.

그의 마지막 기준은 저평가된 주식이다. 그가 투자하는 종목 중 ‘첨단’이나 ‘성장’업종은 거의 없다. 대개 저성장 업종이다. 한마디로 미인주는 없고 남들이 잘 안 쳐다보는 박색주만 있다고 보면 맞다. 그는 이런 중소형 우량주를 오래 보유한다. 소위 가치투자다.

그는 이 원칙을 지킨 이후로 손해본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선물 옵션투자도 흔히 책에 나오는 상실적 수준의 원칙만 지키면 누구나 돈을 벌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쉽게 얘기하니 허탈하다”고 했더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인내를 갖고 원칙을 지키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면서 순간순간 시장상황이 바뀔 때마다 적절한 판단을 해야죠. 그건 어떻게 공식화할 수 없는 순간의 제 판단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제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누구나 관심을 갖고 꾸준히 노력하면 가능하다는 점이죠.”

 

김필수씨의 10억 만들기 연보.

1990년 말 취직. 매월 30만원 이상 저축. 근로자증권저축 월 18만원, 재형저축 월 12만원씩 불입 시작.

92년 주식투자 시작. 원칙 없는 투자로 자금 거의 다 날림.

94년 적금으로 마련한 몫돈 1천여만원 주식투자로 날림.

96∼97년 5백만원의 자금으로 선물·옵션 투자 시작.

98년 종합주가지수 280선에서 주식투자 시작.

99년 선물·옵션 투자로 2년여만에 1억원 벌어들임. 채권투자 시작 (20∼30%의 수익률) 종합주가지수 850선에서 처분(3백∼4백% 수익률) 급매물 아파트 2억원에 매입.

2000년 총자산 5억원대로 불어남. 선물·옵션투자에서 완전히 손 뗌.

2001년 주가 400포인트대에서 주식투자 재개.

2002년 아파트 4억2천만원에 매각. 총 자산 9억원대로 불어남.

2003년 1월 현재 총 자산 약 10억원.

주식 평가액 약 6억원. 어음 약 2억원. 전세금 약 2억원. 

 

김필수씨가 말하는 재테크 원칙

첫째, 현실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돈 관리’가 뭔지만 생각하라. 김필수씨는 “이번 투자에서 꼭 얼마 이상은 벌어야지” 하는 결심을 한 적도 없었다고 한다. 현재 가능한 투자처의 기대 수익률을 비교해 그 중 가장 높은 곳을 선택한 것뿐이다.

이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1999년 주식투자 때도 그는 주가지수가 850쯤 가자 팔아버렸다. 그 후에도 주가가 1,000포인트 이상으로 끓어올랐지만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금리 이상의 수익률이 보장되지 않는 증시였기 때문이다.

2001년 9월 500포인트가 무너지자 그는 다시 투자에 들어갔다. 증시가 ‘금리 이상의 증시기대수익률’이라는 원칙을 충족시켜 줘서였다. 하지만 지난해 4월 한때 주가가 900포인트를 넘자 그는 순간적으로 주식 비중을 확 줄였다.

이런 식으로 늘 시장을 보면서 언제라도 기대수익률이 떨어지는 시점에 오면 순간 순간 투자 포트폴리오를 조정한다.

둘째, ‘과다한 정보’는 성공 재테크의 최대 적이다. 김필수씨는 실패도 많이 했다. 입사 직후 5년여간은 돈만 날렸다. 그후 장외시장에 투자했다가 수천만원을 날리기도 했다. 그는 이 실패의 최대 원인은 “정보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과다한 정보는 실패의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그가 성공의 길로 들어선 분수령은 ‘원칙 고수’였다. “원칙이 중요하지 정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투자회사의 사업과 관련된 정보는 중요하죠.

하지만 명심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증시는 경쟁시장이고 따라서 허위정보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내 경험으로 봐도 공개되지 않은 정보로 투자해서 돈을 번 적은 없었습니다."

셋째, 내가 모르는 분야는 주변 전문가를 활용하라. 그는 부동산 전문가 친구를 1백% 활용했다. 그는 금융투자에 관한 한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 하지만 부동산은 문외한이다. 그렇다고 한국 재테크의 황금알 부동산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가 사용하는 방법은 ‘전문가 1백% 활용법’. “사실 부동산까지 제가 스스로 공부해서 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건 전문가와 정보교류를 통해 해결하지요.”

넷째, 참고 기다리는 자가 승리한다. 시행착오를 거쳐 효과적인 원칙을 세우고, 거기에 따르면서 버텨야 투자의 손맛을 깨우칠 수 있다. 김필수씨의 ‘배당금’장치도 인내를 가능케 해주는 요인 중 하나다.

투자를 하다 보면 주가가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럴 때 기다리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때 손해는 ‘미실현 손실’이다. 주가를 처분하기 전까지는 이익도 손해도 ‘장부상’일 뿐이다. 하지만 금리만큼의 배당이 손에 쥐어지면 장부상 주가손실도 버티기가 쉽다. 투자자마다 어떤 방식이든 ‘버틸 힘’이 있어야 투자의 열매를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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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 모은 사람들(3)]수입의 10%는 '돈공부'에 투자해라


전직 은행원 이상기씨의 재테크 공부법
 

금융권 출신인 이상기(가명. 40)씨. 상고 출신인 그는 10억원 이상의 자산가다. 책 읽고 공부하는 게 취미지만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곧장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가정 형편 탓이었다.

그러니 물려 받은 재산은 있을 턱이 없다. 그가 10억을 모으는데 삼은 밑천은 ‘읽고 예측해 타이밍을 잡는 취미’다. 한 마디로 ‘지식’이란 얘기다.

하루에 5개 이상 신문 읽어

이씨는 하루에 5개 이상의 신문을 읽는다. “종합지 3개에 경제지 2개는 필수죠. 여기에 경제주간지와 부동산 전문지도 꼭 보구요. IT붐이 일기 훨씬 전인 1994년께부터 전자신문도 구독했습니다. 전산 관련 부서에서 일할 때부터 들인 버릇이죠. 그렇게 4∼5년을 했더니 뭔가 트렌드를 보는 눈이 생기더군요.”

신문이 현재라면 책은 미래다. 그는 신문과 책 읽기를 병행한다. 그가 구입하는 책은 연간 1백여권. 이 가운데 30∼40권은 정독하고 나머지는 통독한다. 신문에서 얻은 현실의 단편적 지식을 책을 통해 종합 정리하고 큰 줄기를 잡는 것이다. 이런 식의 버릇을 들인지가 10여년이나 됐다.

하지만 이런 습관이 당장 돈을 벌어다 준 것은 아니다. 그동안 직장을 다니면서 대학(경영학)에 대학원(경제학)까지 마치느라 본격적인 재테크에 신경 쓸 겨를이 없기도 했다.

금융권 근무라는 점을 활용해 빚을 내서 주식투자도 해 봤지만 돈만 날렸다. 증권업계 직원들의 말에 너무 의존했던 게 화근이었다. 그러다보니 직장생활 17년이 된 99년까지도 ‘대출 낀’ 수도권 1억7천만원짜리 아파트 한 채가 그의 전재산이었다.

“돈을 잘 쓰기 위해 번다”는 철학을 가진 그는 마냥 허리띠를 졸라매는 저축도 하지 않았던 터였다. 그러던 그가 본격적인 나선 것은 99년 초였다. 그해는 이씨에게 여러면에서 잊을 수 없는 해로 기록된다.

“IMF가 터지고 대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지면서 중소기업 육성이니 벤처기업 지원이니 하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더군요. 신문 등 정보를 보면서 나름대로 분석한 결과 정부가 적극적인 중소기업 지원과 벤처 육성책을 쓸 수 밖에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우선 99년 1월 추가 대출을 받았다. 유망 벤처 종목을 발굴했기 때문이다. 그래픽(VGA)카드를 만드는 가산전자(현 M플러스텍)였다.

“당시 전산관련 업무를 보다가 가산전자를 알게 됐죠. 매일 컴퓨터를 만지다보니 그래픽 카드 시장이 크게 성장하리라는 확신이 섰습니다. 다른 업체들도 있었지만 대만업체에 지지 않을 만한 경쟁력을 갖춘 회사는 가산전자 정도였어요. 그때 주가는 2백∼3백원 수준이었죠. 이건 확실히 된다 싶더군요.”

그는 대출 받은 2천만원으로 이 회사 주식을 샀다. 가산전자 주가는 99년 말 1만원 대를 뛰어넘어 최고 1만4천원에 육박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씨가 매각으로 실현한 이익은 약 2억여원. 2000∼2001년에 걸쳐 주당 2천5백∼3천원 수준일 때 팔았다.

그래도 수익률 10배를 넘는 대박이었다. 99년 하반기 그는 장외시장으로 옮겨갔다. 거기서 통신관련 종목들에 총 5천만원을 투자했다. 이듬해 7월과 8월에 걸쳐 회수한 액수는 총 6억여원. 약 11배 이상 뛴 셈이다.

무조건 집부터 사라

이씨는 그해 말 퇴사를 결심한다. 좀더 본격적으로 벤처 붐 타기를 위해서 였다. 그는 코스닥 등록을 준비하는 중소기업의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겨 재무담당 최고책임자(CFO)를 맡았다. 구조조정과 투자 유치가 그의 주된 일이었다.

연봉은 별로 높지 않지만 스톡옵션을 받아 짤짤한 재미를 봤다. 1년여 지나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은 그는 컨설팅 업체를 차리고 본격적인 ‘중소기업 주치의’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컨설팅 비용은 대부분 스톡옵션으로 대신 받았다.

그는 컨설팅을 ‘일’이자 ‘투자’로 활용하고 있다. 내실 있는 중소 업체를 발굴해 재포장한 뒤 투자를 유치하고 공개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컨설팅 대가로 스톡옵션을 받는다.

컨설팅 대상 업체를 고를 때 보는 기준은 첫째 2∼3년 후 떠오를 업종, 둘째 자질 있는 CEO가 경영하는 기업, 셋째 시장이 너무 급변하지 않는 업종이다. 지난 2년여 동안 그가 컨설팅한 중소기업은 6개. 이가운데 코스닥에 등록시킨 업체도 2곳이다. 그는 재테크에서 꼭 강조하는 말이 있다.

“집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적 상황에서는 금리가 오르면 인플레가 실물자산에 반영된다. 또 금리가 낮으면 시중 자금이 부동산으로 쏠려서 집값이 오른다. 장기적으로 보면 집값은 어떤 경우에도 오르게 돼 있다는 소리다. 그래서 그는 꼭 집을 사라고 강조한다.

그가 아파트 평수를 늘려 서울에 입성한 시기도 기가 막혔다. 집값이 들썩이던 초기 2002년 1월이었다. 사실 그 무렵 집값 상승은 어느 정도 예견돼 있었다. 2001년 세계경기 동반 침체로 수출이 막히면서 정부는 내수 진작책을 쏟아냈다. 과열된 소비는 문제를 낳게 마련이다.

그는 2001년 말 전세값 상승에 주목했다. 대개 32평형 이상의 전세값이 집값의 60%를 넘어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집값 상승의 전주곡이었다. 이씨는 3억원에 43평형 아파트를 매입했다. 현재 시가는 3억9천만원정도다. 9천만원 정도의 차익을 본 셈.

모르는 곳엔 손 안 댄다

그는 원·달러 환율 1천1백60원대에 달러를 사들여 1천3백원대에서 매각했다. 총 2억원정도 였다. 덕분에 약 12%, 1천2백만원정도의 수익을 올렸다. 골프 회원권도 이씨가 애용하는 투자대상. 최근에는 지난 2000년 11월에 매입해서 이듬해 5월에 매각하면서 약 3천만원의 차익을 올렸다.

그가 귀뜸한 골프회원권 투자법은 이렇다. 대개 11월부터는 골프 회원권 시장도 동면이 들어간다. 수요가 줄어들면서 가격이 떨어지게 돼 있다. 이때 구입하면 싸게 살 수 있다. 반면 성수기는 5월이다.

하지만 3∼4월쯤 되면 골프회원권 시장은 들썩거리기 시작한다. 파란 잔디가 돋아나면 ‘나도 골프회원권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게 마련. 그래서 수요가 늘어난다. 이때 내다 팔면 높은 가격에 팔 수 있다.

그는 환율·부동산·골프회원권 등은 현실투자, 즉 단기운용에 속한다고 말한다. 반면 벤처투자는 2∼3년 후를 내다보는 장기투자다. 그가 주로 투자하는 벤처 업체는 미래형 산업. IT업종과 엔터테인먼트 업체로 제한돼 있다. 소프트웨어 업종 역시 투자수익률은 높지만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투자하지 않는다. 제대로 아는 업종 2∼3종목에만 집중한다.

그에게는 낡은 ‘아이디어 북’이 있다. 10여년 전부터 쓰기 시작한 그 노트에는 온갖 아이디어가 다 적혀 있다. 트렌드를 예측한 메모에서 경제분석 노트, 책을 읽고 난 후의 독후감, 나이대 별로 해야 할 일을 그린 그래프, 다양한 사업 아이디어까지 꿴 10여년을 하루 5시간 이상씩 읽고 생각하고 분석한 흔적이다. 10억원은 절대로 그냥 벌어지는 게 아니다.

 

이기수씨의 10억 만들기 연보.

1982년?취직. 수입의 10%는 책 구입 등 자기개발에 투자.

96년 ?분당 32평형 아파트 2억원에 매입 (1억원 은행 대출)

97년 ?주식투자로 3천만원 손실.

98년 - IMF여파로 이자 감당 못해 분당 아파트 1억6천만원에 매각. 4천만원 손실.

99년 - 가산전자 주식에 2천만원 투자.

?장외시장에서 서두인칩등 IT관련주 매입. 중소기업 CFO로 전직.

2000년 ?가산전자 매각으로 2억원 차익.

서두인칩 등 장외시장 투자주식으로 6억원 차익.

2001년- 중소기업 컨설팅 본격적으로 시작.

3개 업체 구조조정 및 자금조달 컨설팅 수주. 일부 스톡옵션 받음.

2002년 ?개 업체 코스닥 등록.

3개 업체 컨설팅 수주.

서울지역 43평형 아파트 1채, 73평형 빌라 1채 매입.

2003년 2월 현재?총 자산 약 13 억원.

주식 약 1억원.

골프 회원권 약 1억1천만원.

아파트(43평형) 약 3억9천만원

빌라(73평형) 약 7억원 

 

이상기씨가 말하는 재테크 노하우

첫째, 트렌드를 읽을 줄 아는 눈을 길러라. 이씨는 자신의 수입 중 10%를 책 사는데 투자한다. 부자·돈·부동산·경제·경영 등에 대한 책을 주로 읽는다. 연초면 각종 ‘대예측’류의 책도 꼭 사서 본다.

시간이 없어 신문을 다 읽지 못하면 죽 훑으면서 필요한 기사를 오려놓는다. 스크랩해 뒀다가 나중에 반드시 읽는다. 그는 인터넷이 아니라 반드시 신문으로 읽는다. ‘빨리 많이’ 읽기 위해서다.

그는 “현실의 반영인 신문과 미래를 생각하게 해 주는 책을 반드시 병행해 밸런스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 큰 맥락을 제대로 짚어갈 수 있다.

둘째, 내 몸에 맞는 재테크를 찾아라. 성격 급한 사람에게는 부동산이 맞지 않는다. 부동산은 장기적으로 보고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투자 결정을 하기까지 따로 시간을 내 다리 품도 많이 팔아야 한다.

이런 속성을 모른 채 부동산을 주식하듯 투자했다간 낭패보기 십상이다. 반대로 앉아서 정보를 분석하고, 다이내믹하게 거래하는 걸 즐긴다면 주식을 하는 게 좋다. 남이 한다고 무조건 따라 하지 말고 나한테 맞는 방법이 뭔지 찾아봐라.

셋째, 타이밍이 중요하다. 이씨는 인터뷰 내내 ‘한계적 변화(marginal change)’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 아무리 트렌드의 방향을 제대로 짚어 냈어도 흐름이 바뀌는 지점을 포착하지 못하고 너무 앞서 가서나, 너무 뒤쳐지면 모든 게 허사다.

이씨는 앞으로 3∼4년 뒤에 할 사업 아이템을 대 여섯개 마음에 두고 있다. 미래의 트렌드에 맞을 만한 아이디어다. 하지만 섣불리 결정하지 않는다. 늘 몇 년 전부터 아이디어를 염두에 두면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상황이 무르익었다 싶을 때 행동에 들어간다.

넷째, 한 가지 부서보다는 여러 부서를 경험하라. 그는 “업무를 어느정도 터득하면 새 업무로 바꿔라”고 조언한다. 한 우물만 파는 것 보다는 여러 분야를 경험한 것이 소위 퓨전 시너지를 내 효율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씨는 샐러리맨 시절 전산·영업·분석 등 다양한 업무를 담당했던 경험이 재테크나 전직(轉職)에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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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을 모은 사람들 (4)]…“양조장 머슴 생활 잊은 적 없어요”


고졸 영어 강사에서 강남 입시학원 원장 된 유운규氏


 

서울 강남구 신사동 사거리 부근의 지하 2층 지상 7층짜리 건물. KOSEI & 신대일학원이란 간판이 내걸린 이 건물의 주인은 유운규(49) 원장이다. 이 건물의 꼭대기 펜트 하우스가 그의 집이다.

홈시어터에 노래방 시설까지 갖춘 이 곳의 한쪽 벽에는 이상한 액자가 하나 걸려 있다. 길이가 1m는 됨직한 액자 안에 전시된 물건은 헤지다 못해 삭아서 으스러질 듯한 청바지 한 벌. 그 액자 오른쪽 아래에는 이런 영어 문구가 붙어 있다. ‘My by-gone-days (나의 지나간 날들·1967∼1970)·Don’t forget your past (과거를 잊지 말자)

Don’t forget your past (과거를 잊지 말자)

1967년은 유원장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 5남2녀 중 4남인 유원장이 전북 진안에서 양조장 겸 인삼 밭을 하던 먼 친척 집으로 머슴살이를 떠나던 해이기도 하다.

매일 시장으로 술을 나르고, 돼지 똥을 치우고… 그 속에서도 학구열만은 식지 않았다. 주경야독으로 이듬해 인근 중학교에 합격했지만 학비가 없었다. 주인집에서는 먹여줄 뿐 땡전 한푼 주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입학금을 마련해 중학생이 됐지만 학비는 밀리고, 머슴살이와 학업의 병행은 지옥 같았다.

온 몸에 술 냄새와 돼지 냄새를 풍기며 친구들에게 점심 도시락을 얻어 먹는 게 치욕스러웠다. 그래도 돼지 우리에 영어단어를 걸어놓고 외울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덕분에 성적은 좋아 선생님에게서 5·16 장학금 대상자로 추천을 받았다.

하지만 신청 요건인 ‘등록금 납부 영수증’이 없어 애를 태웠다. 그러던 어느날 만취한 선생님이 한밤 중에 양조장으로 쳐들어 왔다. “어린 애를 머슴살이 시키면서 품삯 한번, 학비 한번 안대 주는 파렴치한들!” 유 원장은 그나마 머슴살이도 끝이구나, 싶어 자살할 생각까지 했단다.

그 후 구박은 더 심해졌지만 체면 때문인지, 밀렸던 두 학기 학비를 내줬고 그 영수증으로 5·16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중학교 3년을 마쳤다.그 4년의 머슴살이 상징이 액자 속의 청바지다. 주인 아저씨가 입다가 유원장에게 준, 말하자면 머슴 유니폼이다.

그는 술에 삭고 찢어진 그 바지를 철사 줄로 얽어서 입고 다녔다.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 그 고된 4년을 청바지에 담아 들고 양조장을 떠났다.

대전으로 진출한 그는 계란 배달과 청소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 가면서 고교 시험준비를 했다. 보문고등학교에 응시했지만 낙방. 할 수 없이 후기인 대성고등학교에 시험을 쳐서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학교는 장학금으로 다녔지만 생활이 문제였다. 독서실에서 청소와 심부름을 해가면서 더부살이를 했다. 학교에서는 쉬는 시간마다 선생님들 구두를 닦고 친구들의 머리를 깍아 차비와 책값을 벌었다.

담임선생님의 소개로 입주 가정교사 자리를 얻기도 했다. 모처럼 잡은 가정교사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유원장은 돈을 쪼개 중학교 학원까지 다녔다. 잘 가르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는 “가르치는 것에 대한 기초가 생긴 시기”라고 말했다. 그가 더부살이를 했던 독서실은 학원을 겸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칠판도 닦아주고 교실 청소도 해 주며 친해진 학원강사가 대구에 일자리를 얻어 내려가게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입 원서를 살 돈조차 없어 방황하던 유원장은 그 강사를 쫓아 대구로 내려간다.

대구의 학원에서 우연히 대타로 강의를 하게 된 유원장은 영어강사로서 재능을 발휘한다.그걸 계기로 학원강사의 길로 들어서 인기를 얻었다. 군대(방위)를 마치고 다시 학원강사를 하던 그는 대구 최대 학원에 스카우트 된다.

77, 78년 당시 그의 월 수입이 1백만원 정도였으니 고수입자였던 셈이다. 그 학원의 원장을 하던 모씨는 강사비의 3분의2를 무조건 저축해야 돈을 모을 수 있다며 ‘원천징수’ 해 갔다. 고졸자라는 ‘약점’ 때문에 늘 전전긍긍했던 유원장은 뭐든 시키는대로 했다. 결국, 이 돈도 떼 먹히는 바람에 그의 수년간 고생은 물거품이 됐다.

수입의 3분의 2는 무조건 저축했다

78년 그는 서울 경동시장 앞에 있던 대우학원에 스카우트된다. 하지만 뜨거운 열정으로 시작한 서울 생활은 냉혹했다. 그 해 3월 새벽 6시10분 그의 서울 첫 강의 수강생은 달랑 1명이었다. 그는 그 수강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꼭 나와야 한다. 학생이 안 나오면 나는 쓰레기통이라도 올려 놓고 강의를 할 거다.” 그 이후 지금까지 그는 단 1초도 지각한 적이 없을 만큼 철저한 강사 생활을 했다.

덕분에 점차 명성을 얻었고 월 평균 2백∼3백만원씩 벌어들였다. 알뜰히 돈을 모은 그는 79년 33평형 잠실 진주아파트를 3천4백만원에 사들이고 식구들을 서울로 불러올렸다. 곧 이어 서울 최고의 학원으로 꼽히는 ‘대일학원’에 스카우트 되기에 이르렀다.

일류 강사의 총 집결지였던 대일학원에는 명문대 출신 강사들이 수두룩했다. 거기서 ‘고졸자’로 버텨내기란 정말 힘겨웠다. 수강생들에게 인정 받는 것 이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하루 8번 바쁜 강의 일정 중에서도 유명강사의 강의를 빼 놓지 않고 쫓아다녔다.

장점은 꼼꼼히 적었다가 자기 강의에 반영했다. ‘벤치마킹’이었던 셈이다. ‘유홍렬’이란 별명이 붙을 만큼 유머개발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성문기본영어 강의를 맡았던 그는 커다란 종이 차트에 책 내용을 일일이 다 배껴 썼다.

다른 강사들이 한 문장씩 칠판에 썼다 지웠다 할 시간에 그는 맨 뒤에 앉은 학생까지 다 보일 수 있도록 그 차트를 걸어놓고 설명했다. ‘효율적인 강의 방식’을 고안한 것이다. 때로는 명문대 영문학 석박사들을 불러다 개인 교습을 받아가며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도 했다.

이런 노력 덕에 대일학원에 온 뒤 1년여 만에 그는 수강생 1등을 차지한다. 한달에 수강생 4천2백명 기록을 올린 적도 있었다.

잘 나가던 유원장은 80년 과외금지령으로 또 다시 시련을 맞는다. 재수생만으로는 학원강사로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85년 대일학원 강사를 하면서 압구정동에 사무실을 빌려 재수생 학원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날로 높아 가는 임대료와 걸핏하면 들이닥치는 세무사찰에 시달렸다.

고민 끝에 이민 가 있는 미국 처가로 아내와 아이들을 보냈다. 혼자 남은 유원장은 방송통신대를 다녀가며 강사생활을 계속했다.88년 그는 서울역 학원 밀집 지역에 82평짜리 땅을 1억2천6백만원에 사들였다.

부업으로 독서실을 차릴 요량이었다. 하지만 건축업자의 감언이설에 속아 판단착오로 목욕탕까지 지으면서 건축비가 올라가고 준공 시점도 지연돼 4억5천만원이나 빚을 지게 됐다.

그 사이 압구정동 임대 건물의 보증금은 매년 25%씩 인상돼 월 1천만원을 월세로 내야 하는 상황까지 이르자 그는 ‘내 건물’ 마련에 나선다. 97년 8월 그는 매물로 나온 신사동 지금의 학원건물을 16억2천만원에 매입했다.

서울역 독서실과 목욕탕은 4억5천만원에 팔아 빚을 청산했다. 살던 집을 팔고, 그 동안 모은 돈을 싹싹 긁은 뒤 총 9억원의 신규 대출을 보태 지금의 건물을 매입한 것이다. 3개월 만에 IMF가 오면서 부동산 가격은 폭락하고 대출 금리는 치솟았지만 짠돌이 생활로 버텨냈다. 덕분에 현재 시가 25억짜리 건물을 지킬 수 있었다.

“늘 IMF라고 생각하며 산다"

그는 13년째 특수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특례입학 대상자들의 국내 대학입학을 돕는 일이다. 사실 학원 운영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임대료 정도에 불과하다. “학원을 접고 임대료로 편히 살까도 생각해 봤습니다.

하지만 구 소련지역과 스리랑카 등 동남아 오지에서 외화를 벌어들이는 분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더군요. 그분들의 최대 고민이 자녀교육이거든요.”

현재 그의 제1 목표는 빚 청산이다. 몇 년전 자동차 회사에 다니는 친척의 간청으로 외제차를 한대 구입했지만 버스를 타고 다닐 때가 훨씬 더 많다. 양조장 머슴시절 약속대로 술은 입에도 안 댄다.

빚을 빼고도 20억원 이상의 재산을 가진 그지만 “늘 IMF라고 생각하며 산다”고 한다. 그의 취미는 집에 갖춰 놓은 편집기로 비디오 촬영 작품을 만드는 것. 은퇴한 뒤에는 아내와 함께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비디오 예술가로 사는 게 꿈이다.

그 꿈의 맨 밑바닥에는 ‘청바지’가 있다. 그 청바지는 유원장의 표현대로 “고난이자 동시에 성공의 밑거름”이기 때문이다.

유원장 ‘10억원 모으기’의 결정적 전환점은 논현동 빌딩 구입이었다. 16억2천만원에 사서 현재 시가가 25억원에 달하니 8억8천만원의 차익을 남긴 셈이다. 97년 빌딩을 살 때 까지만 해도 유원장의 재산은 7억원 정도였다.

독서실 겸 목욕탕 투자는 몇 년간 갚았던 이자를 고려하면 오히려 손해였다. 나머지는 ‘소처럼’ 일해서 모은 재산이었다. 잠실 진주 아파트 매입은 재테크의 절호의 기회였지만 동생 사업자금으로 조기에 팔아버린 뒤 10배나 올라 가슴 아팠던 기억도 있다.

사실 유원장의 최대 자산은 ‘최악의 환경을 성공의 밑거름을 삼을 만한’ 성실과 노력이다. 머슴살이하던 소년이 서울에서 손꼽히는 명강사로 성공한 비결을 유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남들보다 모자라다는 생각 때문에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했죠. 다른 강사들이 ‘내가 최고’라고 자만할 때 저는 연구하고 배웠습니다. 대일학원에 간 뒤 5년여 동안 한번도 강사실 소파에 앉아 본 적이 없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는 오히려 재테크를 몰라 손해 본 부분도 많다. 그래서 몇년 전부터 아예 은행에 맡기기 시작했다. 99년부터 유원장의 자산관리를 맡고 있는 신한은행 PB센터 고준석 부동산재테크 팀장은 “연리 10.6%짜리 비싼 대출을 금리 7%짜리 상품으로 바꿈으로써 연간 1천7백50만원의 이자부담을 줄이고 대출금리보다 싼 이자를 받으며 붓고 있던 적금을 깬 뒤 자산구조를 대출 갚는데 주력하는 구조로 바꿨다”고 설명했다.

 

유운규 원장의 재산 형성 과정

1973년 고교 졸업. 첫 영어강의 경험.

77년 대구 최대 학원 영어강사로 스카우트

78년 서울 대우학원 스카우트.

79년 서울 최고의 학원으로 꼽히던 대일학원 스카우트. 월 4천명 이상의 수강생을 끌 어 모으는 최고 인기 강사로 부상. 잠실 진주아파트 33평형 3천4백만원에 매입.

80년 7.30 과외 금지조치로 학원 수입 급감.

82년 동생 사업자금 위해 잠실 진주 아파트 매각.

83년 결혼과 함께 후암동 18평형 동자 아파트를 1천2백만원에 매입.

85년 압구정동에 학원 개설.

88년 서울역 앞 82평짜리 대지를 1억2천6백만원에 매입. 독서실겸 목욕탕 운영. 건축 과정에서 4억5천만원의 빚을 지게 됨.

91년 대학 특례 입학자 대입학원인 KOSEI&신대일학원 시작.

97년 서울역 앞 독서실 겸 목욕탕 4억5천만원에 매각. 신사동 4거리 부근에 지하2층 지상 6층짜리 건물 16억2천만원에 매입. 학원 이전.

2003년 2월 現 논현동 건물 시가 25억원.(부채 9억원)

미국 버지니아주 볼티모어 자택 시가 25만 달러(약 3억원).

정기예금 3억원

순자산 22억원

 

10억 모으기' 포인트

유원장 '10억 모으기'의 결정적 전환점은 논현동 빌딩 구입이었다. 16억2천만원에 사서 현재 시가가 25억원에 달하니 8억8천만원의 차익을 남긴 셈이다. 97년 빌딩을 살 때까지만 해도 유원장의 재산은 7억원정도였다.독서실 겸 목욕탕 투자는 몇 년간 갚았던 이자를 고려하면 오히려 손해였다.

나머지는 '소처럼' 일해서 모은 재산이었다. 잠실 진주 아파트 매입은 재테크에 있어 절호의 기회였지만 동생 사업자금으로 일찍 팔아버린 뒤 10배나 올라 가슴 아팠던 기억도 있다.

사실 유원장의 최대 자산은 '최악의 환경을 성공의 밑거름으로 삼을 만한' 성실과 노력이다.머슴살이하던 소년이 서울에서 손꼽히는 명강사로 성공한 비결을 유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남들보다 모자라다는 생각 때문에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했죠. 다른 강사들이 '내가 최고'라고 자만할 때 저는 연구하고 배웠습니다. 대일학원에 간 뒤 5년여 동안 한번도 강사실 소파에앉아본 적이 없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는 오히려 재테크를 몰라 손해본 부분도 많다. 그래서 몇년 전부터 아예 은행에 맡기기 시작했다.

99년부터 유원장의 자산관리를 맡고 잇는 신한은행 PB센터 고준석 부동산재테크 팀장은 "연리 10.6%짜리 비싼 대출을 금리 7%짜리 상품으로 바꿈으로써 연간 1천7백50만원의 이자부담을 줄이고 대출금리보다 싼 이자를 받으며 붓고 있던 적금을 깬 뒤 자산구조를 대출 갚는데 주력하는 구조로 바꿨다"고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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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을 모은 사람들(5)]경매로 땅사 집값 낮춰 인기


신뢰 하나로 무일푼서 건설사 사장된 김영일 하나씨이엔씨 대표
 

 

“돈버는 방법이요? 자기 경쟁력을 높이는 데만 골몰하세요. 어느 순간부터인가 길이 보일 겁니다.”

돈 버는 비결을 묻는 질문에 대한 김영일(44) 하나씨이엔씨 대표의 대답이다. 사실 김대표의 자산은 10억원을 훨씬 넘는다. 1997년 께 이미 자산 10억원대에 진입했다. 그 후 돈이 본격적으로 불어나기 시작해 지금은 하나씨이엔씨를 비롯해 총 5개의 회사에서 연간 5백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수준이 됐다.

물론 이런 패턴은 그가 사업, 그것도 건설업을 하기 때문이다. 차곡차곡 돈을 모으는 샐러리맨의 패턴이 아니라, 사업에 매진하다가 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큰 돈을 버는 사업가의 전형적 흐름이다.

그는 흔히 말하는 의미의 재테크를 한 번도 안 했다. 주식·채권 같은 단어는 그의 사전에 없다. 하지만 그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재테크의 기초를 튼튼히 쌓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신뢰’였다. 오랜 기간 다져놓은 신뢰의 기초 위에서 큰돈을 벌 수 있었다. 그는 사업 성공의 비결을 “돈 남기기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신뢰부터 쌓은 것”이라고 역설했다.

인생 전환점 된 해외 건설현장

김대표가 부자가 된 스토리는 전라남도 장성의 한 빈농에서 시작된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죠. 버스 값이 없어 중학교·고등학교 6년 내내 12㎞를 걸어다녔을 정도였어요.

운동화 닳는 게 아까워 고무신을 신고 걸어다녔죠. 학교 바로 앞 문방구에서 운동화로 갈아 신고 들어가고, 교문을 나서면 다시 고무신으로 갈아 신었어요. 운동화가 너무 신고 싶어 부모님께 사달라고 조르면 ‘운동화 신고 학교 그만둘래, 운동화 포기하고 학교 다닐래. 둘 중 선택해라.’라고 말씀하셨죠.”

시골길을 걸어갈 때면 학교 친구들을 잔뜩 태운 버스가 지나가면서 뿌연 먼지를 일으켰다. 그 먼지가 폐 속으로 한가득 들어올 때면 그는 다짐했다. ‘남보다 뒤처지는 인생은 살지 않겠다. 지금은 너희들이 버스 타고 지나가지만, 나중에는 내가 더 빠른 속도로 너희를 추월하겠다.'

상고를 졸업한 그는 80년 작은 아버지가 근무하던 동아건설에 입사했다. 첫 월급은 15만원. 월급 받아 밥 먹고 외상 술값 갚고 나면 없어졌다. 입사 후 3년은 그런 생활의 반복이었다.

군대에 다녀온 뒤는 ‘지독한 방황’의 시기였다. 모든 게 답답했다. 머리를 빡빡 깎고 다니며 싸움질도 많이 했다. 그렇게 10개월을 허송세월 하가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

그는 동아건설에 재 입사해 리비아 대수로 공사 현장으로 간다. 해외 건설현장을 ‘인생의 전환점’으로 삼겠다는 각오였다. 그 곳에서 시도 때도 없이 불어닥치는 ‘할라스’ 열풍은 공포였다. 컨테이너 숙소 안으로 뛰어들어가 40∼50℃의 살인적 더위 속에서 모포를 꽁꽁 뒤집어쓰고 있어도 뜨거운 모래 바람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3년을 버텼다.

월급 80만원에 시간외 근무수당까지 합치면 1백20만원 이상이 매월 서울의 통장에 쌓였다. 그 돈을 사업 밑천으로 새 출발하겠다는 희망에 귀국했지만, 돈은 한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동생들 학비와 부모님 생활비로 다 써버린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는 그 출발점을 ‘결혼’으로 삼았다.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사업을 시작하자고 생각했다. 그가 결혼한 과정은 뭐든 마음먹으면 앞뒤 안 보고 돌진하는 스타일을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다. 김대표는 지금의 아내와 선 보던 날 ‘착하다’ 싶어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선을 본지 1달 만에 불과 3번 만나보고 결혼식을 올렸다. 89년 보증금 1백만원에 월세 6만원짜리 방을 얻어 신혼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는 아내에게 한 가지 선언을 했다.

“먹고사는 집안 생활은 내가 책임 못 지겠으니 당신이 알아서 해.” 그리고 5백만원을 따로 빚을 내 양품점을 차려줬다. 그 후 아내는 양품점·미용실 등으로 업종을 바꿔가며 집안 살림을 꾸려갔다. 불과 4년 전까지도 미용실을 운영해 남편 휴대전화 요금까지 내줬다.

사업 6개월 만에 첫 주문 받아

‘생활’의 부담에서 벗어난 김대표는 건설업을 시작했다. 말이 건설업이지 사실상 남의 사무실에 얹혀 사는 백수나 다름없었다. 친분이 있던 지인의 건설회사에 찾아가 ‘명함 하나만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회사도 없고, 지명도도 없는 개인에게 집 짓는 일을 맡길 리 없었기 때문이다.

김대표는 그 명함을 들고 광명·독산동·봉천동·대림동 등지로 서울 시내 헌집이 모여 있는 동네를 온종일 헤매고 다녔다. 재건축할 만한 집이 눈에 띄면 무조건 들어가 명함을 돌렸다. 하루 평균 1백∼2백장씩 뿌려댔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자 드디어 첫 공사 주문이 들어왔다.

10명이 모여서 다세대 주택을 짓는 프로젝트였다. 그는 돈을 남기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성실하게, 잘 지어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1주일에 닷새를 밤을 새워가며 일 했다. 집이 제대로 지어졌다며 만족한 집 주인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한건, 두건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후 연간 3∼4건의 공사를 따내면서 매년 1억∼2억원씩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 돈으로 땅을 사고, 부동산 개발을 시작했다.그러는 동안 흐름을 보는 눈이 생겼다. 우선 반드시 역세권에서만 부동산 개발을 했다.

지하철 노선도가 발표되면 즉각 움직였다. 지하철이 완공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발표 직후 움직여도 충분한 개발차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또 땅을 살 때는 대부분 경매를 이용했다. 경매로 시가의 60∼70% 값에 땅을 구입하면 싸게 산 만큼 분양가를 낮출 수 있었다.

여기에 땅 구입에서 설계·건자재·시공·분양까지 모든 과정을 직접 함으로써 중간 마진을 절감했다. 덕분에 좋은 자재를 써서 튼튼하게 시공하고도 시세의 70%에 분양할 수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채도 미분양 기록이 없었다”고 자부했다.

그가 브랜드 파워가 약한 중소 건설사라는 핸디캡 속에서도 미분양 전무 기록을 세운 비결은 차별화였다. “마감재·가격·분양 시점 등 전방위로 차별화 전략에 주력합니다.

경매 등 원가절감을 통해 분양가를 경쟁업체의 70%로 낮추고, 착공시점 분양 일변도에서 벗어나 건물이 90% 정도 올라간 상태에서 분양하는 등 분양 시점을 차별화하고 색다른 마감재로 고객의 눈길을 끌기도 합니다. 늘 좀 색다르게 하려고 고민하고 노력했지요.”

그는 96년 오피스텔·주상복합·아파트형 공장 등으로 눈을 돌렸다. 2000년 구로동에서 분양한 주거용 오피스텔 가드리움은 보름 만에 전량 분양될 정도로 대히트를 쳤다.

“외국에 다니면서 모든 가구가 붙어 있는 빌트인 아파트를 많이 봤습니다. 한국에서도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가 열리고 독신자가 늘어나고 편리를 추구하는 젊은 세대가 등장하면서 그렇게 가겠구나 싶었죠.

그래서 99년 땅을 매입해서 고급 주거용 오피스텔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맞아떨어진 거죠.” 그는 돈을 벌어보니 ‘돈 자체는 의미가 없더라’고 했다. 오히려 고생하던 시기가 성취감이 있어 더 즐거웠단다.

그는 50대 초반까지 최선을 다해 돈을 벌 작정이다. 그리고 쉰두세살 쯤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기고 본인은 사회사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자산관리를 맡고 있는 이춘우 신한은행 대리는 “교회를 한 채 지어 기부한 적도 있고 지금도 매년 1억원 정도 기부한다”고 귀뜸했다.

 

김영일 대표의 10억원 모으기

1980년 동아건설 입사. 건설현장에서 실무 경험.

1985년 군 제대. 방황하며 백수로 지냄.

1986년 동아건설 재입사. 리비아 대수로 공사 현장 합류 위해 출국. 월 1백20만원의 급여를 그대로 서울 통장에 입금. 리비아 건설현장 총 3년간 받은 급여 5천여만원에 달함.

1989년 월 6만원짜리 월셋방에서 신혼생활 시작. 5백만원 대출로 아내 양품점 차림. 개인 사업자로 다세대·다가구 건축사업 시작.

1990년 연간 3∼4건의 안정적 수주. 연간 1∼2억원씩 벌어들임.

1994년 13평형 빌라를 3천만원에 구입.

1996년 23평형 상가주택을 9천3백만원에 구입. 개인 총 자산 10억원 수준에 달함.

2001년 대지 1백평, 건평 88평짜리 단독주택으로 옮김.

2003년 현재 하나씨이엔씨 등 5개 계열사 소유. 총 매출 5백억원. 

 

김영일 대표의 돈벌기 포인트

김대표는 돈 벌고 싶은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자신을 상품화시켜 경쟁력을 높이라는 점이다. 가장 큰 자산인 자신을 갈고 닦아 매력 있게 만들지 않고는 성공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그래서 늘 차별화를 고민하고 공부한다. 김대표는 동아건설 근무 시절 방송통신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리비아에 다녀오고, 건설사업에 뛰어들면서 우여곡절 속에 10년 만에 졸업했다. 그는 지금도 동국대학교 대학원 부동산학과 ‘학생’이다.

둘째, 신뢰를 생명처럼 여겨야 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고, 신뢰를 쌓다 보면 주변에 사람이 모이고 돈도 자연스레 함께 온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돈은 쫓아 다니면 도망간다”고 강조한다.

김대표는 건설사업을 처음 시작하면서 ‘돈을 벌겠다’는 게 아니라 ‘내 일을 잘 하자’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러다 보니 입소문이 나고, 사업이 번창해 돈을 벌게 됐다. 돈에 초연한 덕에 큰 돈을 번 셈이다.

여기에는 처음부터 “생활은 당신이 책임져라”며 아내에게 책임을 넘긴 전략이 주효했다. 당장의 생계에서 자유로워졌기에 눈앞의 작은 이익이 아닌, 장기적인 사업의 토대를 갖출 수 있었다.

그는 “변화 없는 삶은 재미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업이 일정 궤도에 올랐고, ‘부자’로 경제적 안정도 얻은 지금보다 고생했던 과거가 더 재미있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변화’를 즐기고, 난관에 부딪쳐 그걸 해결할 때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런 면모 덕에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양한 차별화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다. 무일푼에서 지금의 부를 일궈낸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는 부자가 된 뒤에도 흥청망청하지 않는다. 사회환원·교육·자기 개발 등에는 돈을 아끼지 않지만, 쓸데없이 낭비하는 법이 없다. 그가 10억원대 자산을 모았을 때도 그는 23평짜리 상가주택에 살았다.

지금의 1백평짜리 주택으로 옮긴 것도 불과 2년 전이다. 매출 5백억원대 사업을 하는 김대표의 ‘사모님’은 자동차도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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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을 모은 사람들(6)] “무조건 낮은 가격 쓰는 것은 금물”


6년 동안 경매로 10억원 번 정은경 사장의 투자성공기, 밤엔 공부하고 낮에는 뛰어
 

“돈은 꼭 벌어야 하는데 방법이 없는 분에게 경매를 해보라고 권하겠어요. 하지만 만만하게 보면 큰일납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분석하고 발품 팔아야죠. 1년 내내 고생스레 직장 다녀서 연봉 2천만∼3천만원 받는 것처럼 경매도 노력을 기울여야 그만큼 버는 거예요.”

정은경(가명·41) 사장은 경매 예찬론자다. 그녀에게 경매는 그냥 ‘재테크 수단’이 아니다. 회사를 부도의 문턱에서 벗어나게 해준 ‘구세주’다. 그리고 지금은 회사 자금의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그래서 정사장은 경매를 ‘자기 방어의 수단’이라고 말한다. 무슨 스토리길래 경매를 이렇게 얘기할까.

돈 벌려면 경매를 공부해라

“1997년 IMF 위기 때였어요. 원청업체들이 줄줄이 쓰러지니 하청업체들도 대금을 못 받아 연쇄부도 위기에 놓였죠. 우리 회사도 당장 어음이 안 도는 거예요. 안되겠다 싶어서 채권을 행사하려고 보니 경매를 넣으라는 거예요.

그게 뭔가 싶어서 법원 담당과를 찾아가 봤더니 찬바람만 쌩쌩 불더군요.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고…. 어떻게 하겠어요, 모르는데. 배워야죠.”

정사장은 당장 모 대학 부설 경매강좌에 등록했다. 3시간씩 1주일에 3번, 만만찮은 수업이었다. 낮에는 회사 꾸리느라 동분서주하고, 밤에는 강의 듣고, 주말에는 과제물 준비로 정신없이 보냈다.

과정이 거의 끝나가는데 뭔가 부족했다. 그래서 수강 동기생 중 10여명을 추려봤다.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들만 골랐다. 전문 분야도 안배했다. 법무사·세무사·회계사·은행·교수 그리고 ‘○○연구소’를 만들었다.

이 열성 경매학생들은 매주 한 차례 세미나도 열고, 각자 골라온 경매물건을 서로 점검해 줬다. 말하자면 ‘정보 품앗이’였다.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였다.

“첫 실전 경매물건은 연구소 사무실이었어요. 8천5백만원에 샀는데 지금 시가는 1억5천∼2억원쯤 가죠.” 정사장은 강의가 끝날 무렵 배운 지식을 이용해 첫 경매를 시도했다.

“처음이라 복잡하지 않고 아주 쉬운 물건부터 시작했어요.연립주택이었는데, 한 번 유찰돼 7천8백만원이었어요. 7천5백만원에 전세를 살고 있는 세입자가 있었는데 확정일자를 받아둬서 채권 1순위였고요.

복잡할 게 없는 단순한 물건이었던 셈이죠. 세입자 돈 내주고 내보내면 되니까요.” 쉬운 물건이라 경쟁자가 많을 것으로 보고 마음속으로 8천만원 정도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 가 보니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8천5백만원을 써서 낙찰받았다.

“사전 답사를 가서 세입자도 만나보고 시세도 알아봤거든요. 시세는 1억2천만원이더군요. 세입자는 더 살고 싶다고 하고요. 8천5백만원에 사도 실제 내 돈은 1천만원이면 되잖아요. 더욱이 지하에 세를 줄 수 있도록 화장실과 부엌이 달린 독채가 있더라고요.”

정사장은 지하를 1천5백만원에 세 놓았다. 결국 ‘내 돈’은 한푼도 안 든 셈이다. 1년 후 팔았으니 양도세도 안 물었다. 판 가격은 1억5천만원. 무려 6천5백만원의 차익을 봤다.

하지만 말처럼 쉽게 되는 건 아니다. 우선 낙찰되기가 힘들다. “입찰에서 2등은 꼴등이나 똑같아요. 1등 해서 낙찰되지 않으면 다 소용없죠.”

작게 벌어도 만족할 줄 알아야

정사장은 10건이면 3건 이상은 낙찰된다. 어려서부터 숫자 감각이 뛰어나 현장에 온 사람들을 보면 대개 ‘감’이 온단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10건이면 1건 되기도 쉽지 않다.

“20건 하다가 한번도 낙찰 안 되니까 쓸데없이 그동안 돈과 시간만 버렸다며 다시는 안 한다고 분해하는 분들도 봤어요. 그렇게 쉽게 생각하면 중도에 포기하게 돼죠. 끈기와 인내심 없이는 경매로 성공하기 힘듭니다.”

경매를 잘 하려면 욕심부터 버려야 한다. 옆에서 보니까 쉽게 돈 버는 것 같아 뛰어들었다간 큰코 다친다. 작게 벌어도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이 없이 무조건 가격을 짜게만 쓰면 낙찰은 요원할 뿐이다.

정사장은 지금까지 25건 정도의 경매를 했다. 이 가운데 10억원이 넘는 물건은 연구소 회원들과 공동으로 사들이기도 했다. 그런 공동 건수가 3∼4건을 넘는다. 회사 사무실도 경매로 사서 마련했다.

2001년 1억4천만원에 샀는데 지금 시세는 2억5천만원이다. 또 8천2백만원에 산 사무실도 현재 1억3천만원에 달한다. 지금까지 경매로 얻은 차익을 얼추 계산해 봐도 10억원을 훨씬 넘는다. 하지만 그렇게 번 돈은 대부분 회사 자금으로 들어갔다.

정사장에게 경매는 돈 버는 목적이 아니라 사업의 보조 수단이기 때문이다. “똑같이 돈을 벌어도 사업으로 버는 쪽이 훨씬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직원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그 식구들을 먹여살리는 거잖아요. 훨씬 다이내믹하고 보람도 커요.”

정사장은 직원들에게 경매 정보를 알려줘 내집마련을 도와줄 때가 기쁘다고 한다. “사실 작은 회사라 월급을 많이 주진 못하거든요. 대신 내집마련을 원하는 직원들에게 경매를 가르쳐 주죠.

물건도 골라주고, 입찰 때 얼마 쓰라고 액수도 알려주고. 차익이 크진 않지만 시세보다 2천만원만 싸게 사도 그게 어디예요?”

경매를 배워서 또 좋은 게 있다. 받을 대금 못 받았을 때 법을 어떻게 이용하고,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받을 수 있는지 훤해졌다. 그래서 정사장은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꼭 경매 배우라”고 권한다.

“경매를 하려면 관련 법을 다 알아야 해요. 그러면 나를 방어하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죠.”

정사장은 주말이면 물류센터로 쓸 경매물건을 찾느라 바쁘다. 법원 사이트와 지지옥션(GGI)·인포뱅크(infobank) 등 경매전문사이트에도 들어가 물건을 뒤진다.

“인터넷 덕분에 일이 훨씬 쉬워졌어요. 법원사이트에 들어가면 모든 게 다 있죠. 집에 앉아서 등기 열람도 가능하고, 부동산 정보망을 통해 시세 확인도 가능하죠. 그렇게 확인 가능한 정보를 다 모은 뒤 그 지역에 사는 지인들에게 정보를 물어봅니다. 그리고 나서 확신이 서면 현장 답사를 하죠.”

정사장은 한번도 주식이나 다른 재테크를 해본 적이 없다. 한국 증시는 아직 합리적으로 움직이지 않아 도박 같기 때문이란다. 그럼 부동산은 뭐가 좋을까.

“정직하고 담백하잖아요. 강남 개발 붐 때처럼 그냥 앉아서 돈방석에 앉던 시대는 지나갔어요. 연구하고 노력해야 하죠. 땀 흘린 만큼 대가가 돌아오는 것, 그게 부동산입니다.”

 

정은경 사장 10억 만들기 연보

1981년 대학 입학.

1982년 부친의 약국 경영하면서 일식집 운영.

1985년 대학 졸업. 독서실과 음식 체인점 창업.

1988년 사업 청산. 가정주부로 변신.

1995년 회사 설립.

1997년 연쇄부도 위기. 모 대학 부설 경매강의 과정 등록. 경매공부 시작.

1998년 과정 이수. 동기들과 연구소 설립. 첫 경매로 6천5백만원 차익.

2001년 경매를 통해 회사 사무실 1억4천만원에 매입. 현재 시가 2억5천만원.

2002년 새 법인 설립. 2개 회사 동시 운영 중.

2003년 지난 5년간 25건의 경매로 10억원 이상 차익 실현. 

 

3가지 경매 성공법

정은경 사장이 말하는 성공 경매 투자법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물건에 대한 정보를 확실하게 파악해야 한다. 우선 내가 잘 아는 지역으로 한정한다. 부동산 정보와 가격·흐름을 완전히 알고 있어야 경매에서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 토지·건물·상가·아파트·단독주택·빌라 중 한 분야를 고른다. 토지라면 건축법을 1백% 숙지해야 올바로 시뮬레이션 해보고 이익이 될 만한 땅을 고를 수 있다. 자연녹지나 개발제한구역을 사놓고, 법으로 금지된 건물을 계획했다간 돈만 날린다.

둘째, 경매 물건을 정했으면 현장 답사는 필수다. 서류로 정보를 파악한 뒤 경매에 참여하기 전에 반드시 현장에 가 봐야 한다. 시세 체크도 필수다. 시세를 체크할 때는 집을 파는 척하면서 내놓는 시세를 묻는다.

부동산에서는 내놓는 사람에게 싸게 부르고, 사는 사람에게 비싸게 말한다. 보수적으로 시세를 판단하려면 파는 가격을 기준으로 하는 게 좋다.

셋째, 등기부 등본을 떼 보고 법적인 권리자를 파악한다. 하지만 등본에도 안 나와 있는 실거주자가 있을 수 있다. 그건 주민등록 등본을 떼 보면 된다. 경매를 넣는 사람인데 권리를 알아보러 왔다고 하면 동사무소에서는 알려준다. 다음은 재주껏 세입자 정보를 알아낸다. 배짱 좋게 직접 가서 만나볼 수도 있고, 동네 수퍼마켓에 들러 평을 들어볼 수도 있다.

그 정도 하고 나면 은행에 대출 가능한 금액과 금리 조건을 미리 알아본다. 그리고 경매에 들어갈 돈을 계산한다. 이때 기준은 ‘최악의 시나리오’. 예를 들어 권리자와 소송으로 가는 상황까지 가정해야 한다는 얘기다.

다음은 금액. 세입자를 내보내는 데 드는 돈·수리비·대출액수·소송이 1∼2년 정도 끌었을 때를 가정한 대출 이자비용·너무 바빠 직접 소송준비를 하지 못할 경우 변호사 비용도 생각한다. 명도소송 변호사 비용은 대개 3백만원. 여기에 취득세 등 각종 세금도 넣는다.

그리고 나서 그 금액과 시세를 봤을 때 남는 차익이 순수히 떨어지는 이익이다. 세입자 내보내는 비용도 그렇다. “만약 제가 경매를 통해 4천만원의 차익을 본다고 칩시다. 세입자는 전세금에 대한 권리가 없어서 무일푼으로 쫓겨나게 생겼고요.

갑자기 오갈 데 없어진 세입자들은 당연히 못 나가겠다고 버티겠죠. 이때 무조건 나가라고 하면 결국 소송까지 갈 수밖에 없어요. 저는 설득을 합니다. ‘법대로 하면 그냥 쫓겨난다, 대신 지금 나가면 1천만원을 주겠다.

집 구하는데 보태 써라’는 식으로요. 정사장이 말하는 경매 배우는 법. 우선 책을 읽고 강의를 듣는다. 추천 책은 「신 경매총람」과 「나는 이런 부동산으로 돈 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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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을 모은 사람들(7)]"안 먹고 못배기는 빵만 만든다 "


권성범 리치몬드 과자점 대표… 제과점 시다에서 출발, 선진 제과기술 도입해 15년만에 창업

 

물리학에 ‘임계질량’이란 용어가 있다. 핵분열 물질이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최소의 질량을 말한다. 아무리 강력한 폭탄도 임계질량에 도달 못하면 터지지 않는다. 돈에도 임계질량이 있다. 이 단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돈이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돈이라는 게 매년 차곡차곡 쌓이는 게 아닙디다. 열심히 돈을 모아도 돈이 확 불어나지 않는 상태가 계속되면서 오랫동안 다져 지고, 또 다져 지다가 어느 순간 ‘확’ 늘어 나더라는 말이죠. 나한테는 그 시기가 80년대 말, 90년대 초쯤이었던 것 같아요.”

단돈 2천원 들고 무작정 상경

권상범(59) 리치몬드 과자점 대표가 말하는 ‘부의 임계질량’ 이다. “다져 지고, 또 다져 지고…” 이 대목에서 그의 표정이 아득해졌다.

덤덤한 듯 표현했지만 ‘다져진’ 세월은 땀과 노력의 뒤범벅이었다. 가난 탓에 중학교 진학도 포기한 채 산에서 나무하고 잔심부름하며 촌에서 보낸 10대, 외가댁이 꾸려가던 경북 의성의 다과점에서 ‘롤 마끼’ 배우던 17세, 대구 제과점 ‘시다’ 생활로 보낸 18세 시절.

사춘기의 질풍노도 조차 삶의 현실에 빼앗긴 ‘잃어버린 10대’였다. 그때 권대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내 후손에게는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장사뿐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에 가야 진짜 뭘 배우겠다 싶어 무작정 상경했습니다. 주머니에 딱 2천원 넣고서 말이죠. 친구 작은댁에 빌붙어 자면서 일자리 얻는다고 버스타고 다녔더니 꼭 열흘만에 동이 나더군요. 다행히 돈이 떨어질 때쯤 종로 5가에 있던 제과점 성림당에 취직했어요.”

권대표의 서울 진출 첫 직장 월급은 1천5백원이었다. 그래도 하루 4∼5시간밖에 자지 않고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하지만 서울 생활 초년병인 열아홉의 청년 권상범에게 성림당 공장장의 고약한 성질은 참기 힘든 고역이었다.

“정말 못 견디겠더라구요. 취직한 지 2달 반만인 1965년 2월1일 그만 두겠다고 선언했죠. 새 사람을 구해야 할 테니 보름의 여유를 주겠다고요. 2월15일까지는 최선을 다해 일할 테니 염려 말라고 말이죠.”

권대표 표현에 따르면 이 ‘사표 사건’은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막상 그만뒀는데, 갈 곳도 없고 돈도 없고… 겨울 끝자락 매서운 2월에 허술한 가마니 한 장 덮고 길거리에서 잔 날이 많았습니다.

낮에는 시내를 걸어 다니며 제과점이란 제과점은 다 들어가 취직자리를 알아봤죠. 그때 뼈에 사무치게 결심한 게 한가지 있죠.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다음 직장을 구하기 전에는 절대로 그만두지 않는다’ 무모했지만 이 경험 덕에 그 후의 어려운 일도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그 노숙생활 막바지에는 ‘무임승차라도 해서 집으로 내려가자’는 생각도 수없이 들었다. 권대표 말대로 “그때 약해졌으면 모든 게 끝”이었을 것이다. 즉, 지금의 ‘대한민국 제과 명장’ 권상범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생 끝에 광교 풍년제과에 취직이 됐죠. 3월2일이었습니다. 당시 풍년제과는 장안에서 손 꼽힐 정도로 큰 제과점이었어요. 공장에만 25명이 있었으니까요.

거기서 저는 설것이를 했습니다. 그래도 하루 4시간밖에 안 자면서 열심히 했죠. 슬쩍 어깨너머로 배우기도 하구요.”

권대표는 당초 월급 2천원을 받기로 했다. 그런데 한 달 후 3천원으로 올랐다. 열심히 하는 모습이 너무 대견해 주인이 ‘파격 인상’을 단행한 것이다.

입대를 불과 3개월 앞두고 아버지 없는 외아들은 군대를 면제 시켜준다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결정 덕분에 군대 갈 3년도 벌었다. 하루 하루 한단계씩 올라가는 재미도 쏠쏠했다.

나폴레옹 제과서 8년만에 독립

“그릇 닦는 일 한단계 위가 오븐을 보는 일이었죠. 그 다음은 반죽치는 일, 그 다음은 케익 시트 치고 쿠키 만드는 일 그리고 맨 마지막이 데코레이션이었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노력해서 겨우 케익 시트 만드는 일까지 올라가면서 공장장이 바꿨어요. 새 공장장은 자기 사람들을 잔뜩 데리고 왔죠.

저는 고생 고생 올라갔던 자리에서 죽 미끄러져 다시 반죽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또 올라가면 공장장 바뀌고 다시 또 미끄러지고.”

그러길 3번이었다. 짧은 기간이나마 인생의 밑바닥까지 경험한 후였던 권대표는 더 이상 열 아홉의 심약한 소년이 아니었다. 달라져 있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한달만 지나봐라.

나를 다시 안 쓰고 못 배길 테니.’ 열심히 하는 만큼 자신감이 붙던 때였다. 이런 권대표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당대 최고로 꼽히는 김충복씨가 공장장으로 오면서 권대표도 안정을 찾아간다. 그 밑에서 5년간 부공장장을 하면서 실력도 크게 늘었다. 그렇게 총 8년만에 풍년제과를 떠난다.

“당시 광화문 덕수제과와 삼선동 나폴레옹 과자점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했습니다. 뭘로 보나 덕수제과가 한수 위였죠.나폴레옹은 시작한지 불과 2년 됐을 때고.”하지만 권대표는 나폴레옹을 선택했다. 장래 성장성을 본 것이다.

그때가 1972년 10월2일이었다. 나폴레옹 제과점으로 간 권대표는 공장장으로 화려한 시절을 보낸다. 승승장구하자 나폴레옹 사장은 권대표를 일본으로 유학 보낸다. 75년 권대표는 동경제과학교에 입학한다. 6개월 단기 코스였지만 총 3백50명 중 유일한 외국인으로 많을 걸 배운 시절이었다.

선진 빵 기술을 배운 덕에 그의 귀국 후 나폴레옹은 더욱 번창했다. 79년 말 그가 독립해 나올 때 공장 직원은 무려 30명이었다. 8년 전 입사 당시 5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6배로 늘어난 상태였다.

월급 5만원에 스카우트 된 권대표의 몸값은 그만두던 79년 대한민국 제과점 공장장 최고인 60만원이 돼 있었다. 8년만에 12배의 초고속 연봉 상승이었다.

그는 나폴레옹 주인의 도움으로 은행 대출 1천만원에 저축액 1천5백만원을 얹어 마포경찰서 옆에 ‘나폴레옹’ 간판을 내건 제과점을 차린다. 그게 지금도 같은 장소에 있는 ‘리치몬드 과자점’의 전신이다. 다섯평 남짓 공간에 권대표는 ‘마지막 모험’을 걸었다. 가격은 고가전략. 주변 빵집보다 30%나 비쌌다.

“애들 입맛은 절대 못 속입니다. 한번 우리 빵집에서 먹어보면 다른 집 빵은 안 먹으려 하죠. 예나 지금이나 자식 이기는 부모 있습니까?” 고가 전략에, 키드 마케팅까지, 요즘 유행하는 마케팅을 권대표는 그때 이미 체득한 셈이다.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루가 지난 빵은 팔지 않았다. 하루의 장사를 끝내고 문을 닫을 때면 남은 빵을 모두 싸서 바로 옆 마포서 전경들에게 기증했다.

여윳돈 생기면 일본 가서 기술 배워

9월 개점 이후 한두 달은 좀 어려웠다. 하지만 크리스마스를 고비로 입소문이 퍼지면서 고객이 본격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매출은 늘었지만 돈이 쌓이지는 않았다. 여윳돈이 생기면 당장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권대표는 그때도 늘 ‘혁신’에 목말라 했다. 그래서 돈이 좀 모이면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거기서 1∼2달씩 머물면서 일본 제과점에서 일을 배우고 왔다. 아무리 적어도 1년에 2번씩은 그랬다.

욕심나는 최신 기계가 있으면 그것도 사들였다. 그런 식으로 벌어들인 돈을 재투하는 선순환이 계속되다가 83년 11월, 홍대 앞에 2호점을 낸다. 그리고 2년 후 ‘나폴레옹’ 상호의 그늘에서 벗어나 ‘리치몬드 과자점’으로 독자 간판을 내 걸었다.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스위스의 국립 리치몬드 제과학교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그리고 12년만인 94년 3호점인 성산점을 열었다.

권대표는 몇 년 전 마포점을 독립채산제로 친척에게 넘기고 현재 홍대점과 서교점 2곳과 리치몬드제과 기술학교 서교동·천호동 2곳을 운영하고 있다. 제과점은 더 늘리지 않을 생각이다. ‘품질 관리’를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는 ‘빵맛’ 자체에 애착이 크다.

그에게 지난 6일은 뜻 깊은 날이었다. 그의 장남인 형준(29)씨가 동경제과학교를 졸업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국내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던 그는 아버지 뒤를 잇기 위해 2년 과정의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28년 전 ‘선진문물’로 권대표를 그렇게 흥분 시켰던 바로 그 학교를 아들이 졸업하는 것이다. 제과점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나면 권대표는 어떤 노후를 꿈꿀까? “무슨 노후계획은 무슨 계획입니까? 기력이 다 하는 날까지 빵을 만들어야지.”

‘제과 명장’이란 타이틀이 멋지게 어울리는 사람이다.

 

권상범 대표의 10억 만들기 연보

1964년 단돈 2천원 들고 서울 상경.

1965년 2월 첫 직장 사직. 노숙 3월 풍림제과 취직. 첫 월급 2천원.

1968년 풍림제과 부공장장. 저축 1백만원.

1972년 나폴레옹 제과 공장장. 월급 5만원.

1975년 일본 동경제과학교 유학.

1978년 봉천동에 대지 43평짜리(약 1천만원) 내집 마련.

1979년 독립. 마포에 2천5백만원 들여 나폴레옹 과자점 설립.

1982년 공덕동에 대지 63평짜리 집으로 이사.

1983년 나폴레옹 과자점 홍대 2호점 오픈.

1985년 간판을 리치몬드로 교체.

1987년 서교동 대지 150평짜리 집으로 이사.

1988년 성산동에 대지 2백43평 구입.

1993년 대치동에 리치몬드 제과 기술학원 설립. 총 자산 10억원 넘어섬.

1994년 성산동 대지에 지하 2층 5층짜리 빌딩 신축. 1층에 리치몬드 성산점 오픈.

1998년 서교동 대지에 건물 신축. 대치동 리치몬드제과 기술학원 서교동으로 이전 

 

권대표가 말하는 부자되는 법

일본 유학 시절이었다.

권대표는 일본에서 제법 컸던 ‘모짜르트’ 제과점으로 실습을 나갔다. 거기에는 제빵 제과의 본고장인 오스트리아에서 온 기술자가 있었다. 권대표는 벅찬 가슴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물론 영어로 했다. 말이 통하는 게 신기했는지 오스트리아 제빵 개발 책임자는 하나씩 둘씩, 권대표에게 일을 시켜보더니 곧 전권을 주었다. 권대표는 이렇게 해서 선진 제빵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시골 출신 권대표가 어떻게 영어를 했을까.“열 일곱살, 경북 의주 다과점에 있을 때부터 통신강좌로 영어공부를 했어요.

뭔가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풍년제과에서 부공장장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서는 잠깐씩 짬을 내서 영어 학원에 다녔죠.”

언젠가는 필요할 것 같아 꾸준히 했다고 한다. 그 덕에 일본에서도 유럽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그는 “준비하는 사람만이 기회를 잡는다”고 말했다. 권대표가 배합표와 배합 공정 등을 적어 놓은 옛날 과자 노트에는 3개국어가 등장한다. 한국어, 영어 그리고 일어.

그는 풍년제과 시절 제과점 쪽방에서 먹고 자면서도 소형 카세트까지 사다 놓고 열심히 공부했다. 예순이 다 된 지금도 1년에 3∼4번씩 외국에 나간다. 최신 제과점을 둘러보고 신제품을 벤치마킹 한다.

부자 되는 비결을 물었더니 그가 첫번째로 꼽은 것도 “자기 분야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괜히 남의 것만 부러워 하지 말고 가까이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였다. “부지런한 자는 누구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는 월급을 3천원 받을 때나 60만원으로 올랐을 때나 월급의 3분의2 정도는 저축했다. 풍년제과에서는 2천원으로 시작한 그의 월급은 8년간 근무하고 그만둘 때 4만원으로 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의 통장에는 1백만원이 넘게 저축돼 있었다.

신혼 초 집을 마련할 돈도 변변히 없었지만 나폴레옹 제과점을 그만 둘 때쯤 시가 1천만원이 넘는 집을 장만했다. 1978년 봉천동에 마련한 첫 ‘내집’이었다. 얼마나 좋았던지 하루도 빠짐없이 앞마당을 쓸었다.

1주일 내내 일하고 어쩌다 쉬는 날이면 부산 등지로 세미나를 다녔다. 손꼽히는 제빵 기술자가 돼 있었던 덕에 ‘강의 요청’이 많았다. 70년대 말에 강의료로 10만원을 받았다. 권대표는 내집 마련을 위해 쉬는 날에도 세미나를 다닐 정도였다.

그 다음 옮긴 집은 당시 시가 약 6천만원 하던 대지 63평짜리 공덕동 단독 주택이었다. 권대표는 마포 제과점 초기, 아현·공덕동 주변 부자집으로 ‘빵 배달’을 가기도 했다.

그때 그 집들을 쳐다보며 ‘나는 언제 이런 집에 살까?’ 했었다. 그 후 불과 3년만인 82년 4월 권대표는 바로 그 동네에 집을 샀다. 감개무량했다.그리고 5년 후인 87년 지금의 제빵 학원 자리인 서교동 대지 1백50평을 사들여 건물을 올렸다.

그 무렵부터 몇 년간이 ‘자산이 크게 불어난 시기’였다고 한다. 권대표의 현재 자산은 10억원이 훨씬 넘는다. 하지만 주식이나 부동산, 그 어떤 것에도 돈을 굴려본 적이 없다.

오로지 빵 만드는 데서 일등이 되겠다며 열심히 일하고, 우직하게 모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 다지고 또 다지다 보니 성실의 힘으로 ‘부의 임계질량’에 도달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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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을 모은 사람들]“8개월 공부해 경매 성공률 100%”


이문수 솔로몬 상호저축은행 지점장…돈 버는 공부하는 데 투자 아끼지 말아야


 

이문수(38) 솔로몬 상호저축 은행 테헤란로 지점장은 돈에 관한 한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을 살았다. 부자집 아들→기울어진 가세→주식투자 성공→보증으로 빚더미→총 자산 10억원 축적. 이 리스크의 굽이마다 그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을 발휘했다. 냉정한 판단력과 결단력 덕이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중고등학교 시절의 경험이 돈에 대한 태도를 결정짓는 것 같아요. 강원도에서 큰 목장을 하는 부자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중학교 시절 부친께서 앓아 누우시면서 집안 사정이 어려워졌죠. 그때 어렵게 살면서 돈에 대한 절제를 체득했던 것 같아요."

자제력이 투자성공의 비결

대학 시절 주식투자 스토리는 그의 남다른 절제력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그는 대학 4학년 경제학 강의시간에 했던 모의 주식투자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 자신감이 붙은 그는 모험을 감행한다.

전세금을 빼서 주식투자에 뛰어든 것. 당시 전세 6백만원짜리 자양동 반지하에 살던 그는 집 주인을 설득해 전세를 보증금 1백만원에 월세 10만원 계약으로 돌렸다. 그리고 전세금 5백만원으로 주식투자에 나섰다. 주식 활황세의 끝물이던 1989년의 일이었다. 그는 그 돈을 5개월 만에 4천만원으로 불려 놓았다.

여기까지는 여느 주식투자 성공 에피소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가 돋보이는 점은 그 다음부터다. 이 지점장은 마음속으로 이 4천만원에 ‘결혼 자금’이란 꼬리표를 달아 은행에 넣어뒀다. 그리고 주식에서는 완전히 손을 끊었다. ‘5개월 만에 7백%의 수익’이란 강렬한 중독성 투자를 경험한 20대 젊은이로선 좀처럼 실천하기 힘든 일이다.

그 돈은 결혼 때 전세 자금 밑천이 됐고, 현재 10억원에 달하는 자산의 종잣돈이 됐다. 자리를 잡아가던 그를 또 한번 끌어내린 사건이 ‘빚 보증’이었다. 첫 직장 동부화재에서 절친한 선배 2명에게 빚 보증을 섰다가 총 4천5백만원의 채무를 떠안게 된 것. 이지점장은 99년 회사를 그만둔다.

퇴직금으로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그가 받은 퇴직금은 2천만원. 여기에 아내 몰래 빼낸 전세금 2천만원을 얹었다. 8천만원 아파트 전세금을 6천만원 보증금에 월세 50만원으로 바꾼 것. 그리고 주택금융 전문회사인 뉴스테이트 캐피탈로 옮겼다. 매일 아침 7시에 출근해 새벽 1∼2시에 퇴근할 정도로 열성적인 영업 덕에 인센티브를 포함한 그의 연봉은 1억원에 달했다.

그 무렵 아파트 주인은 전세금 원상복귀를 요청해 왔다. 그는 아예 대출을 받아 집을 사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2000년 11월, 가락동에 24평형 아파트를 1억2천만원에 샀다. 가진 돈이 6천만원이었으니 나머지 6천만원은 대출을 받았다. 이 아파트 시세는 현재 2억5천만원이다.

그가 부동산 경매에 취미를 붙이면서 본격적인 돈 불리기에 들어간 것도 이 때쯤이다.

“빚 보증으로 돈에 몰리면서 재테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직장생활만으로는 1∼2억원 모으기도 얼마나 힘듭니까. 부업을 하지 않고는 돈을 모은다는 게 어렵죠.당시 주식투자로 거액을 날려 빚더미에 앉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자살 결심까지 했을 정도였죠. 우리는 의기 투합해 돈 벌 궁리를 했죠.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경매였습니다.”

1주일에 60만원짜리 경매 강의도 들어

당시 주택금융 업체인 뉴 스테이트에 다녔던 이 지점장으로서는 직장 일과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는 경매를 배우기 위해 공을 많이 들였다. 서점에서 경매 관련 책을 사서 읽는 것으로 워밍업을 했다. 그 후 1주일에 60만원짜리 거액의 경매 강의(건국대)도 듣고 부동산 금융 전문가 과정(한국생산성본부)도 1백시간 이상 수료했다.

여기에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법원 경매 담당자에게 개인적인 사사까지 받았다. 그가 경매공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후 실전에 돌입하기까지 들인 시간은 약 7∼8개월. “법원과 각종 경매 사이트에 들어가 뒤져 본 뒤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주말을 이용해 물건을 확인하러 다녔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2002년 하반기에 기회가 왔다. 강원도 횡성 근처에 경매 매물로 나온 밭 9천7백평을 낙찰받은 것이다. 감정가만도 1억6천만원이었지만 거듭 유찰된 결과 7천6백만원에 사들였다. 현재 이 땅의 시가는 7억∼8억원.

“서울에서 1백10㎞, 스키 리조트인 피닉스 파크에서 30분, 성우 리조트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교통의 요충지였어요. 주변에 냇가도 있고…. 몇 년 동안 버려져 묵은 밭으로 전락해서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지, 위치로 보나 주변 환경으로 보나 잠재력이 큰 땅이었습니다."

그가 이 땅을 발굴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준비 덕이었다. 그는 뉴 스테이트 시절 20일간의 미국 출장 기회를 이용해 현지 팬션을 스터디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강원도 횡성에 있는 통나무 학교의 과정도 수료했다.

시골에서 자라나 나무 베고 자르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처음부터 팬션 사업을 염두에 두고 고른 땅이었다.앞서 2002년 1월에는 원주에 12평짜리 아파트를 1천9백만원에 경매로 사들였다.

그리고 2백만원을 들여 수리한 뒤 월세 27만원을 받고 있다. 이 아파트의 현재 시가는 3천만원. 하지만 미래가치는 훨씬 높다. 지난 85년에 지은 저층 아파트에 대지지분이 14평이나 된다.

이런 아파트의 앞길은 정해져 있다. ‘재개발’이다. 이 지점장은 살 때부터 이 점을 노렸고 예상대로 최근 재개발 허가가 떨어졌다. 추가비를 일정액 부담하면 28평형 아파트를 받게 된다. 주변 28평형 아파트의 시세는 7천만∼8천만원을 호가한다. 같은 해 3월에는 군시설지를 공매를 통해 4백만원에 샀다. 집안 어른들의 묘자리를 염두에 둔 구매였다.

그는 줄잡아 하루 50∼60명씩 고객을 만난다. 그러다 보니 얼굴만 보면 돈을 빌리러 오는 것인지, 갚으러 오는 것인지, 신용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눈치챌 정도가 됐다. 은행 문을 열고 들어올 때의 표정과 차림새를 보면 대출 여부가 70∼80%는 가늠이 된단다.

“대출하러 와서 금리가 높다며 깎아 달라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면 저는 가족들이 모두 핸드폰을 갖고 있는지부터 묻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드리죠. ‘직장에 다니는 한 사람만 빼 놓고 모두 해지하십시오. 휴대폰 4대면 한 달에 30∼40만원 사용료가 나옵니다. 그 돈으로 이자를 내고, 적금을 부으십시오.”

그는 “핵심은 내버려둔 채 엉뚱한 길을 찾는 것”이 돈 관리에 실패하는 사람들의 고질병이라고 진단한다. “머리가 가려운데 엉덩이를 긁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어떤 상황에서도 핵심을 짚어 돌파하면 갈 길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이지점장은 앞으로 3년 정도 직장생활을 더 할 작정이다. 그 후에는 강원도 땅에 내려가 본격적인 팬션 사업을 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그 전까지는 저축은행의 격전지 테헤란로에서 솔로몬을 업계 리더로 올려 놓는데 최선을 다할 작정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45세 이전에는 직장생활을 청산할 겁니다. 45세가 넘으면 정열을 잃고 생각이 굳어지기 쉽기 때문이죠. 내 사업을 해서 10년 안에 1백억원을 모으는 것, 이게 제 목표입니다.”

 

이문수 지점장의 10억 만들기 연보

1989년 대학 4학년 때 전세 보증금 5백만원으로 주식투자. 4천만원으로 불림.

1991년 동부그룹 입사. 월급의 60∼70% 저축.

1999년 빚 보증으로 4천5백만원 부채 떠안음. 퇴직금과 일부 전세금으로 부채 상환.

2000년 1억2천만원짜리 가락동 아파트 매입(대출 6천만원). 현재 시가 2억5천만원.

2002년 원주에 12평짜리 아파트 1천9백만원에 경매로 매입. 현재 시가 3천만원.

군 시설지 430평 공매 통해 4백만원에 매입. 현재 시가 1천5백만원.

강원도 횡성 9천7백평 밭 7천6백만원에 경매로 매입. 현재 시가 7억∼8억원. 

 

이문수씨의 부동산 성공기

“부동산을 사춘기식 짝사랑의 방식으로 보면 안 됩니다. 냉정한 눈으로 사각지대를 짚어 낼 줄 알아야 합니다.”

이지점장이 꼽은 바람직한 부동산 투자 태도 제1항이다. 부동산을 객관적인 눈으로 보지 못하고 ‘짝사랑’에 빠지게 되면 단점이 안 보이고, 결국 투자실패로 이어진다. 냉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발품’도 필수적이다. 그는 “부동산에 관한 한 ‘발품’만이 나를 성장시킬 수 있다”고 단언한다.

그가 강원도 땅을 구입할 때 스토리. 그는 입찰에 참여하기 전에 강원도 땅 현지를 3번이나 갔다 왔다. 처음엔 혼자 가 보고, 그 다음엔 주변의 부동산 전문가와 함께 가 보고, 동네 어른들을 찾아가 풍수지리 얘기까지 들었다.

“풍수지리상의 조건도 가격 형성에 영향을 미치죠. 특정 땅의 풍수지리는 그 동네 어른들이 가장 잘 압니다. 그래서 저는 과일 바구니를 사 들고 동네 어른께 찾아가 물어봅니다.”

강원도 횡성 땅은 삼태기가 입을 벌리고 있는 모양으로 복이 들어오는 전형적인 터였다. 실제로 이 땅은 풍수지리적으로 최고의 조건을 갖췄다는 이점 덕에 절을 짓겠다는 등의 구매 희망자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시가 7억∼8억원까지 호가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꼼꼼히 분석하는 그를 보고 주변에서 ‘낙찰 받은 것도 아닌데, 별 짓을 다한다’고 놀렸지만 결국 그 덕에 투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가 두번째로 꼽은 점은 ‘경기흐름을 주시하라’는 것. 경기가 꺾이기 시작하면 현금 확보가 최고다. 부채는 최대한 청산해야 한다. 위기는 기회라고 한다. 위기가 닥치면 생사가 갈리고, 그 재편 과정에서 반드시 돈 벌 기회가 생긴다.

이때 위력을 발휘하는 게 현금이다. 경기의 흐름을 보고 현금을 미리미리 확보하면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걸 못 보고 부채만 지다간 위기의 희생양이 되는 수밖에 없다.

셋째는 ‘자기 일을 열심히 하면 돈벌이가 보인다’는 것이다. 동부화재 시절의 일이다. 그는 입사 1년 만인 92년 보험설계사 4명에 불과하던 의정부 영업소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의정부 영업소의 성적은 전국 2백50개 동부화재 영업소 중 2백20위. 그는 먼저 경기도 여성 문화회관을 찾아 여성들을 대상으로 ‘직업을 가지면 좋은 이유’를 강의했다.

내용에 보험설계자의 장점을 슬쩍 끼워 넣은 것은 당연하다. 그 후 의정부 영업소에는 그의 부드러운 말솜씨에 설득당한 여성 보험설계사 지망생들이 잇따라 문을 두드렸다.

영업소 보험설계사들의 느슨한 시간관리에도 메스를 댔다. 그는 아침 9시 30분, 조회시간 정각이 되면 영업소 문을 닫아 버렸다. 때마다 야유회도 갔지만 정각에 오지 않으면 어김없이 버스를 출발시켰다.

‘시간은 돈’이라는 칼 같은 시간 엄수 원칙에 보험설계사들도 점차 적응해 갔다. 그 결과 이 지점장이 맡은 지 불과 1년 만에 의정부 영업소 성적은 전국 1등을 차지했다. 보험설계사도 48명으로 12배나 불어났다. 이런 실적 덕에 그가 빚 갚느라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도 고액 연봉을 받고 뉴 스테이트 캐피탈에 스카우트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