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집 인테리어/한옥·백토·황토·흙집

빌라형 주택 사이에 둘러싸인 나지막한 한옥집

솔리스톤1 2015. 8. 19. 11:02

 

오래된 집

청운동의 어느 한옥

 

아래로뭇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영역에 우연찮게 발을 들여놓게 되거나 특출 난 분야에서 큰 성과를 성취하게 되었을 때, 개개인의 노력도 노력이지만 사람들은 종종 '운이 좋았다'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겸손이 미덕이기는 하나, 무성의한 듯 툭 내뱉는 '운이 좋았다'라는 말에는 작업자가 스스로의 과업을 단지 자신만의 훌륭하며 누구든 쉽게 넘어 설 수 없는 성역으로 애워 싸놓은 경계를 허물고서, 범 인류적인 시대의 지표로써 환원하는 의도 또한 다분히 들어 있을 것이라 여기며, 어느 여름날 한 세기 가량 머물러 온 오래된 집의 마지막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게 된 일을 행운이라 생각하는 바이다

빌라형 주택 사이에 둘러싸인 나지막한 한옥집 한 채. 벽돌과 시멘트로 투박하게 담을 쌓아 놓아서 그런지, 한옥 특유의 개방감이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다만. 



담 너머로 엿보이는 처마 밑의 촘촘한 서까래와 진흙 사이로 빼곡히 덮인 기왓장, 지상과 한 척 이상 거뜬히 떨어져 있는 묵직한 주춧돌 등이 한옥의 요소를 충직하게 드러내 주고 있으나, 곳곳에 드러난 개량의 흔적이 30년대 도시화가 이루어질 무렵에 지어진 도심 주거형 개량 한옥임을 짐작케 한다. 아마, 내부는 타일과 유리 등의 실용적인 자재들로 꾸며져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대문을 열자 펼쳐진 바닥과 벽 타일의 화려한 패턴. 주춧돌의 묵직함과 퍽 조화를 이루며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머금은 채로 잘도 붙어 있다. 벽타일의 모습은 요사이 심심찮게 유행하기도 하는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의 단순하며 투박한 모습을 띄고 있는데, 단순한 디자인의 실용성은 언제고 통용되는 상식처럼 은근한 저력이 전해 온다. 전통적으로 크고 묵직한 초석으로 기단과 대들보를  높일수록 그 집안의 권세를 드러내기도 했는데, 기능상으로도 장마철에 침수를 방지하고 구들장 밑으로 불을 놓아 겨울철에는 온돌 문화를 형성하는 등  다분히 실용적인 형태이기도 했다. 이 가옥 또한, 폭이 좁은 마루 아래로 불을 놓아 온실 생활을 꾸려갔던 듯 한데, 타일에 남겨진 열기의 흔적이 자연스럽게 잔존하고 있다. 




현관처럼 구비된 공간 양 옆으로는 작은 화장실과 창고가 딸려 있는데, 개량 한옥이라고는 하나, 전통 한옥의 행랑채와 같이 꽤나 전통 방식으로 공간을 구획하고자 하는 시공자, 혹은 집주인의 의지가 살며시 엿보이는  듯하다. 칠의 색이 확연하게 차이나는 미닫이 문의  한쪽. 한 공간에 오랜 세월 지내오며 삶의 흔적을 조금씩 고쳐나간 집 주인의 정성과 애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오른 켠의 고정문을 기준으로 수도 없이 열고 닫혔을 본래의 한 쪽 미닫이 문은 너무 낡아버리거나 닳아서 교체된  듯하다. 



한옥에 이끌리는 이유는 그 수많은 매력적인 요소들을 제쳐두고서라도, 확 트인 개방감에서 이다. 외관상 전혀 드러나지 않는 내부의 마당과, 그 마당을 통해서만 올려다 보이는 뻥 뚫린 하늘. 오직 내부로 향해야만 비로소 관망할 수 있는 풍경이다. 생활 공간과 비등한, 아니 어찌 보면 마당에 더 넓은 공간을 내어 준 한옥의 개방된 구조는 누누이 언급되는 '자연친화적' 또는  '유-불-도 삼교의 사상적' 전통적인 세계관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열린 장'에서 이루어졌을 누군가의 행위들이 공간만으로써도 상상력을 자극하도록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마당이라기보다는 광장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크기의 트인 내부의 장과 두 단으로 쌓은 돌계단, 한 자는 족히 넘는 기단과 주춧돌로 높인 실내 공간으로 보아 여염집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ㅁ'자 구조로 둘러 싸인 한옥의 본채로 보이는 공간으로 들어서자, 꽤 최근의 현대식으로 개조된 부엌 살림이 등장한다. 내부의 벽채와 바닥은 꽤 오래전에 한 번 대대적인 수선 작업을 거친 듯, 아파트 붐이 일기 전의 여느 양옥집 내부의 모습을 하고 있다.   




현재 시각 오후 4시 10분 전, 온도는 약 33도. 삼성이 별 세 개로 기업 아이던디티를 구축하던 그 시절의 빈티지 에어 컨디셔너가 부착되어 있던 빈 한옥의 주방 공간. 



드넓은 마당으로 난 개방감만으로는 부족하다. 전통 한옥의 대청마루 뒤로는 개폐형 문이 나 있기도 한데, 그 문을 여는 순간 집 주인이 손수 가꾼 정원이 하나의 화폭으로 등장하는 장관이 펼쳐진다. 이 개량형 한옥 또한 주방을 지나 응접실로 향하는 공간 너머로 뒷 뜰이 등장한다. 사람의 손길이 멎은 식물들은 제 멋대로 덩굴을 치며 자라나고 있으나, 과거 한 때 번성했을 뒷 뜰의 속삭임이 귀를 스치는  듯하다.  






집 주인의 안내에 따라 여러 사람들의 발길이 스쳐 갔을 응접실. 지어질 당시의 원형을 가장 가깝게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멋 부리지 않은 차분한 샹들리에 조명등이 한옥의 공간과 퍽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응접실의 바닥만이 가장 최근에 나온 나무무늬의 장판을 깔고 있다. 여느  집처럼 손님을 모시는 공간에 힘을 주듯, 그만큼 집 주인이 가장 신경을 쓰고 있던 곳이 아니었을까. 




과거 부잣집의 상징인 일제 가전제품. '나쇼날 에어컨'이 멋 부린 벽체와 합체되어 응접실 공기의 온도를 담당했을 터이다. 110v의 전압을 220v로 맞추는 '도란스' 장치가 있어야만 가동할 수 있던 과거의 풍경. 박물관이라도 와 있는 듯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실제로 이 한옥집은 어느 박물관 관장이 인수해, 훼손 없이 해체작업을 거친 후, 원형 그대로 박물관에 전시될 예정이라고 한다. 실제 집주인은 부군이 작고하고 난 뒤, 거처를 옮겨간 상황이라고. 작년까지만 해도 이 곳에서의 삶이 지속되고 있었다고 하니, '운이 좋아' 오래된 집의 형태를 그대로 기록할 수 있었던 이 날의 상황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박물관을 관람하고 온 것이나  다름없었던 일.  




응접실을 지나 'ㄱ'자로 꺾인 안채로 향하니 생활의 편의에 따라 벽체와 천장을 합판으로 막은 여느 생활 공간이 등장한다. 문 틀 사이로 박아둔 벽걸이 후크가 왠지 정겹다. 홈이 어긋나 어지간한 힘을 들여서는 열리고 닫히지 않는 한껏 멋 부린 미닫이 문의 기하학적 무늬 또한 시선을 강탈한다. 가까이 들여다 보니 요지경 속을 들여다 보는 듯한 화려한 유리 장식이 다시 한 번 시공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빗물을 효과적으로 받아내기 위해 얼기 설기 설치한 배수로를 쫓다 보니, 어느새 높은 곳으로 와 있다. 



2015년 여름, 오래된 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