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템퍼러리 아트’를 말할 때 고전 중의 고전인 회화는 배제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가장 주목할 만한 회화적 여정을 보이고 있는 이 1980년대생 작가들의 그림 앞에 서면 여전히 깊고 강렬한 울림을 주는 회화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지면이라는 직사각형에 회화라는 평면을 마음껏 펼쳤다.

우정수 ‘Tit fot Tat

“붓을 움직이기 위한 손가락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은 캔버스를 통해 오롯이 드러나요. 회화란 육체가 직접적으로 반영되는 매체죠. 세상에 이런 것들이 몇이나 있을까요?”

 

‘Tit for Tat’(2019), Acrylic, Ink on canvas, 324 260cm

우정수 / 1986년생 모든 것은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대학생 무렵 시간 강박에 시달렸어요. 당시 강박을 해소해주는 유일한 방법은 독서였는데, 마치 독서가 시간을 물질화하는 도구처럼 느껴졌어요. 서재에 차곡차곡 쌓이는 책을 보며 비로소 제 시간이 보존되었다고 믿었죠. 우정수를 캔버스 앞으로 이끄는 것은 언제나 책에 담긴 서사였다. 알렉산더 대왕 전기에 나오는 저주받은 나무에 관한 서사는 드로잉 연작 ‘책의 무덤’에 녹아들었고,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장님 예언자 테이레시아스 이야기를 접하며 구상한 작품은 ‘피니어스’다. ‘피니어스’는 2019년 서울시립미술관의 기획 전시 <강박>에서 선보인 커미션 작품이기도 하다. 테이레시아스는 지혜로운 예언자였지만 신들의 분노를 사며 장님이 된 인물이에요. 미래를 볼 수 있지만 당장 눈앞의 현실을 볼 수 없는 존재가 작가인 저 자신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현대인의 모습 같기도 했죠. 고대나 중세에는 죽음에서 공포가 비롯됐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가난으로부터 공포가 시작된다고 생각하거든요. ‘피니어스’의 경우 패턴으로만 화면을 구성했는데, 이 패턴들은 일부 경제학자들이 단군 이래 최고의 호황기였다고 일컫는 1990년대 TV 드라마나 시트콤에 등장하는 화려하고도 조악한 벽지와 의상에서 모티프를 가져왔죠.

금호미술관, 온그라운드2, OCI미술관 등지에서 총 다섯 번의 개인전을 치르며 미술계에 자신의 이름을 견고히 다져온 우정수는 최근 들어 회화성을 강조하는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이에 수반하여 서사를 전달하는 데 치중하기보다 특정 도상을 변형하거나 해체해 ‘서사를 중단시키는’ 시도는 2018년 연작 ‘Calm the Storm’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아무리 단순하고 명확한 이야기를 제시하더라도 저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이야기가 온전히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동시에 명화에 쓰인 도상을 아무런 맥락 없이 반복하거나 변형하면 사람들은 그 속에서 어떤 이야기를 읽을까, 라는 궁금증이 들기 시작했죠. 그렇게 시작한 ‘Calm the Storm’은 신약성서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폭풍을 잠재우는 예수를 형상화한 작품이에요. 그림에서 단순히 예수의 머리띠를 없앴을 뿐이지만 폭풍을 잠재우는 기적에서 폭풍을 두려워하는 군중으로 전체 서사가 뒤틀리게 되었죠. 이렇듯 한정된 요소로 전체를 변화시키는 작업이 요즘엔 굉장히 흥미로워요.강박의 탈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