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리이야기/좋은글·따뜻한글

마음의 눈을 뜨라!~ 성철스님

솔리스톤1 2016. 3. 20. 14:38

 

 

 

 

어느 산에 스님 한분이 살았다.

들리는바로는 아직까지 한명도

그의 말문을 막히게 한사람이 없다고 한다

.

 

어느 날 똑똑한 아이가

손에 작은 새 한마리를 쥐고

스님에게 가서 물었다.

 

"스님 이 새가 죽은 건가요?

아니면 살아있는 건가요?"

 

 

그리고 생각했다.

이 스님이 살았다고하면 목졸라 죽여버리고

죽었다고 하면 날려보내야지

 

 

내가 드디어 이 스님을 이기는 구나!

 

 

스님이 웃으면서 말했다.

 

"얘야 그새의 생사는

네 손에 달렸지. 내 입에 달린것이 아니란다."

 

 

꼬마는 새를 날려보내며 말했다.

 

"스님은 어떻게 이토록 지혜로우신가요?"

 

그러자 스님이 대답했다.

 

"예전에는 정말 멍청한 아이였다.

그러나 매일 열심히 공부하고 생각하다 보니

지혜가 생기기 시작 하더구나.

너는 나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 같구나."

 

 

그러나 아이는

슬픈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어제 어머니께서 점을 보셨는데

제 운명은 엉망이라고 했다는군요."

 

 

스님은 잠깐동안 침묵하더니

아이의 손을 당겨 잡았다.

 

 

"얘야, 네 손금을 좀 보여주렴~"

이것은 감정선, 이것은 사업선, 이것은 생명선.

~ 이제는 주먹을 꼭 쥐어보렴."

 

 

아이는 주먹을 꼭 쥐고 스님을 바라 보았다.

 

 

"얘야, 네 감정선, 사업선, 생명선이 어디있느냐?"

 

"바로 제 손안에 있지요."

 

 

"그렇지, 바로 네 운명은 네 손안에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입에 달린 것이 아니란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 네 운명을 포기하지 말거라!"

 

 

 네 운명은 네손안에 있는것이지

다른사람의 입에 달린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 네 운명을 포기하지 말라

 

 

마음의 눈을 뜨자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이다'라고 말합니다.

마음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즉심시불이라고도 합니다.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팔만대장경에 담겨 있는 만큼 불교를 알려면

팔만대장경을 봐야 할 터인데, 누가 그 많은 팔만대장경을 다 보겠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불교는 모르고 마는 것인가?

팔만대장경이 그토록 많지만 사실 알고 보면

마음 '심'자 한 자 있습니다.

팔만대장경 전체를 똘똘 뭉치면 심자 한 자 위에 있어서,

이 한 자의 문제만 옳게 해결하면 일체의 불교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일체 만법을 다 통찰할 수 있고

삼세제불을 한눈에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알게 되면 부처를 알게 됩니다.

마음이 부처이므로 그래서 삼세제불을 한눈에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초지종이 마음에서 시작해서 마음에서 끝납니다.

 

그래서 내가 항상 '마음의 눈을 뜨자' 하는 것 아닙니까?

 

그뿐입니까?

마음의 눈만 뜨고 자기가 먼 천지개벽 전부터

벌써 성불했다는 것 천지개벽 전부터 성불했으니

현재는 말할 것도 없고 미래겁이 다하도록 성불한

그대로임을 알게 됩니다.

마음의 눈을 뜨면 결국 자성을 보는데 그것을 견성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성불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관법을 한다, 주력을 한다, 경을 읽는다,

다라니를 외우는 등등 온갖 것이 다 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서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 참선입니다. 

 

참선! 견성성불하는 데에는 참선이 가장 수승한 방법입니다.

참선하는 것은 자기 마음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불교신도나 스님네들만 하는 것이 아니고,

신부나 수녀도 백련암에 와서 3천배 절하고 화두 배워 갑니다.

나한테서 화두 배우려면 3천배 절 안 하면 안 가르쳐 주니까. 

며칠 전에도 예수교를 믿는 사람들 셋이 와서 3천배 절하고 갔습니다.

이 사람들한테 내가 항상 말합니다.


"절을 하는데 무슨 조건으로 하느냐 하면,

하느님 반대하고 예수 욕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제일 먼저 천당에 가라고 축원하고 절하라."


  이렇게 말하면 그들도 참 좋아합니다.

이런 것이 종교인의 자세 아닙니까?

우리 종교 믿는 사람은 전부 다 좋은 곳으로 가고,

우리 종교 안 믿는 사람은 모두 다 나쁜 곳으로 가라고 말한다면

는 점잖은 사람이 아닙니다.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나를 욕하고 나를 해치려 하면 할수록

그 사람을 더 존경하고, 그 사람을 더 돕고,

그 사람을 더 좋은 자리에 앉게 하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닦아야 한다는 것, 여기에 대해서는 예수교나 다른 종교인들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가톨릭 수도원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왜관에 있는데,

그 수도원의 독일인 원장이 나한테서 화두를 배운 지 10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에도 종종 왔는데 화두 공부는 해볼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그가 처음 와서 화두를 배운다고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신네들 천주교에서는 바이블 이외에는 무엇으로써 교리의 의지로 삼습니까?"

 

  "토마스 아퀴나스(T. Aquinas)의 '신학대전' 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아퀴나스는 그 책이 거의 완성되었을 때

자기 마음 가운데 큰 변동이 일어나서 그 책에서 완전히 손을 떼어 버렸는데,

처음에는 금덩어리인 줄 알았다가 나중에 썩은 지푸라기인 줄 알고

차버린 그 책에 매달리지 말고,

그토록 심경이 변화된 그 마음자리,

그것을 한번 알아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화두를 부지런히 부지런히 익히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불교를 믿지 않는 다른 종교인들도 화두를 배워서

실제로 참선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 마음 닦는 근본 공부인 선을 알아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화두를 말하자면 또 문제가 따릅니다.

화두를 가르쳐 주면서 물어보면,

어떤 사람은 화두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옆에서 배우라고 해서 배운다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사람은 괜찮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것은 누구든지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하고는 뭐라고 뭐라고 아는 체를 합니다.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성철스님 어록 / 명언


사람들은 소중하지 않은 것들에 미쳐 칼날 위에 춤을 추듯 산다.


마음의 눈을 바로 뜨고 그 실상을 바로 보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실행 없는 말은 천번 만번 해도 소용없다. 참으로 아는 사람은 말이 없는 법이다.


베풀어 주겠다는 마음으로 고르면 아무하고도 상관없다.
덕 보겠다는 마음으로 고르면 제일 엉뚱한 사람을 고르게 된다.


세가지 병을 조심해야 한다. 이름병, 재물병, 여색병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은 이름병이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만약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습니다.


대나무가 가늘고 길면서도 모진 바람에 꺾이지 않은 것은 속이 비었고 마디가 있기 때문이다.

대나무의 마디는 사람이 겪는 좌절과 갈등, 실수, 절망, 병고, 이별 등과 같다.

대나무처럼 살라!


- 얘야, 네 감정선, 사업선, 생명선이 어디있느냐.
- 바로 제 손안에 있지요.


- 그렇지, 바로 네 운명은 네손안에 잇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입에 달린 것이 아니란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 네 운명을 포기하지 말거라!


마음의 눈을 뜨고 자기를 바로 보라.


밥은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고, 옷은 살이 보이지 않을 정도면 됐고, 공부는 밤을 새워서 하라.


도의 길은 날마다 덜어가는 길이다. 덜고 또 덜어 아주 덜 것이 없는 곳에 이르면 참다운 자유를 얻는다.


시간은 자기 생명과도 같다. 잃어버린 건강은 음식으로, 잃어버린 재산은 근면검소로 회복할 수 있지만 잃어버린 시간은 회복할 수 없다.


무슨 일의 성과가 없다고 초조해할 것이 못 된다.

인과의 통장에 저축하고 있는 셈이니까. 먼지 한 알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곳이 이 세상이니까.


작은 일이라도 끝을 마치지 않으면 큰 일 또한 끝을 맺을 수 없는기라.


참으로 사는 첫 걸음은 자기를 속이지 않는데 있다.


고깔쓴 나를 보고 무엇을 얻으려 하지 말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개발해 쓰도록 하라.


도를 닦는데는 '간절하다'는 이 한마디만 알면 옛 스님들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고 근심할 필요도 없고,

생사문제를 해결하지 못 한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기라.


배움의 길은 날마다 더하고, 도의 길은 날마다 덜어간다.

덜고 또 덜어 아주 덜 것이 없는 곳에 이르면 참다운 자유를 얻는다.


자기의 과오만 항상 반성하여 고쳐 나가고, 다른 사람의 시비는 절대로 말하지 않아야 한다.


천 마디 말 보다 한 가지 실행, 실행 없는 헛소리는 천번 만번 해도 소용이 없다.


남에게 대접받을 때가 나 망하는 때이다.

나를 칭찬하고 숭배하고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수도를 제일 방해하는 마구니며 도적이다.


천근을 들려면 천근 들 힘이 필요하고, 만근을 들려면, 만근의 힘이 필요하다.
열근도 못 들 힘을 가지고 천근만근을 들려면,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면 미친 사람일 것이다.
힘이 부족하면 하루바삐 힘을 길러야 한다.


그림 속의 떡은 아무리 보아도 배부르지 않고, 그림 속의 사람은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


절해서 업 녹는 걸 눈으로 본다면, 절하려는 사람들로 가야산이 다 닳아 없어질 것이다.


만사가 인과의 법칙을 벗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어 무슨 결과든지 그 원인에 정비례한다.


나를 위하여 남을 해침은 곧 나를 해침이고 남을 위하여 나를 해침은 나를 살리는 길이다.


모든 사람을 부처님처럼 섬기라. 그것이 참 불공이다.


나를 쳐다보지 말고, 밖에서 진리를 찾지 말고 자기를 바로 보아라.

각자 스스로의 마음속에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잘 개발하라.


내 밥 내가 먹고 사는 사람들인데 어째서 남의 밥을 구걸하느냐? 말입니다.
부디 내 밥 내가 먹고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생각해보라. 눈 감은 사람이 어떻게 바로 걸을 수 있겠는가?
먼지 않은 거울이 어떻게 사물을 바로 비출 수 있겠는가.


한 부엌에서 은혜와 원수가 나는 것이니 내 주위를 잘 살펴야 한다.
나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원수가 되며 은혜가 될 수 있겠는가?
나를 가장 잘 아는 아내(남편), 자식, 형제, 친구, 선후배가 은혜가 되고 원수가 되는 것이다.
한 부엌에서 원수가 아닌, 은혜가 나는 행복한 삶을 살도록 관대함을 가져야 한다.


자기자신은 큰 바다와 같고 물질은 거품과 같다.


내눈이 열려야 열린세상을 받아드릴수가 있다.
내눈이 열려야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
무엇때문에 세상을 사는지 삶의가치를 어디에 둘것인지
생이란 구름한점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구름한점 흩어짐이니
있거나 없거나 즐거이사세
웃지않고 사는이는 바보라네

 

 

 

 

수행이란

 

성철스님

안으로는 가난을 배우고
밖으로는
모든 사람들을

공경하는 것이다.

어려움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알고도

모른 척하는 것이다.

용맹 가운데
가장 큰 용맹은
옳고도 지는것이다.

공부중에 가장 큰 공부는
남의 허물을 뒤집어쓰는것이다.

 

 

화두에 대해 또 좋은 법문이 있습니다.

 

 

불감 근 선사라는 스님의 법문입니다.

 

 

  오색 비단 구름 위에 신선이 나타나서

 

  손에 든 빨간 부채로 얼굴을 가리었다.

 

  누구나 빨리 신선의 얼굴을 볼 것이요

 

  신선의 손에 든 부채는 보지 말아라.

 


 

  생각해 보십시오.

신선이 나타나기는 나타났는데 빨간 부채로 낯을 가리었습니다.

 

신선을 보기는 봐야겠는데, 낯을 가리는 부채를 봤다고

신선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화두에 있어서는 모든 법문이 다 이렇습니다. '

정전백자수자'니 '삼서근'이니 '조주무자'니 하는 것은 다 손에 든 부채입니다.

부채! 눈에 드러난 것은 부채일 뿐입니다.

부채 본 사람은 신선을 본 사람이 아닙니다.

빨간 부채를 보고서 신선을 보았다고 하면 그 말 믿어서 되겠습니까?

 

화두는 암호인데 이 암호의 내용을 어떻게 해야 풀 수 있는가?

잠이 푹 들더라도 일여한 데에서 깨쳐야만 풀 수 있고

그 전에는 못 푼다는 것,

이렇듯 화두를 참구하는 자세가 근본적으로 딱 서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음의 눈을 확실히 뜨면,

이것이 견성인 동시에 뜰 앞의 잣나무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란 것은 팔만대장경에 그토록 많고 많지만,

똘똘 뭉치면 마음 '심'자 한 자에 있습니다.

 

 

 

 

가장 간단합니다.

마음 '심'자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문제,

일체 만법을 다 알 수 있는 것이고,

일체 법을 다 성취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이란 자성을 본다는 것인데, 견성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공부 부지런히 부지런히 하여 화두를 바로 아는 사람,

마음 눈을 바로 뜬 사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냥 "견성하자" "성불하자" 하면 너무 불교 전문적인 것이 되어

일반 민중과는 거리가 멀어 집니다.

"마음의 눈을 뜨자" 하면 누구에게나 좀 가깝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또 사실도 그렇고, 그래서 "마음의 눈을 뜨자" 하는 말을 많이 합니다.

 

오늘 이야기를 가만히 생각해서 하나라도 좋고 반쪽이라도 좋으니,

실지로 마음의 눈을 바로 뜬 이런 사람이 생겨서

부처님 해면을 바로 잇도록 노력합시다.‘

  

 '뜰 앞의 잣나무'니 '삼서근'이니 '마른 똥 막대기'니

하는 것은 다 손에 든 부채입니다.

부채 본 사람은 신선을 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을 확실히 뜨면,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보입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부지런히 공부하여

 

화두를 바로 아는 사람,

즉 마음의 눈을 바로 뜬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즘 마음이 너무 심란해서 그냥 누가 툭 건드리면 울 것 같아서. 법정스님성철 스님대담을 사왔음. 108배도 다시 해야지...

2. 성철스님과 ..http://blog.daum.net/h70802001/12881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