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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이 다하는 그날까지, 장애인을 위한 구두를 만들 겁니다

솔리스톤1 2007. 6. 21. 18:50
한쪽 팔로 장애인 구두 만드는 남궁정부 소장
“내 삶이 다하는 그날까지, 장애인을 위한 구두를 만들 겁니다”

열두 살 때부터 40여 년 동안 수제화를 만들던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사고로 오른팔을 잃고 말았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는 왼쪽 팔로 장애인 구두 만들기에 뛰어들었다. 불편한 발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는 ‘희망’ 그 자체.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희망 구두’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다. 최근에 선보인 자서전 「꿈꾸는 구두 5만 켤레」(북클릭)를 핑계 삼아 남궁정부 소장을 만났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저 윤아예요. 보내주신 카드 잘 받았어요.
그동안 제 신발과 실내화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몸조심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윤아 올림-

서울 천호동의 세창정형제화연구소(www.isechang.com)에 들어서면 벽에 붙어 있는 여러 장의 편지가 인상적이다.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요지는 단 하나, ‘정말 감사하다’는 것이다. 편지를 보낸 이들은 하나같이 세창정형제화연구소 남궁정부(67) 소장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남궁정부 소장이 팔을 잃은 건 말 그대로 ‘사고’였다. 1995년 10월 11일. 그로부터 12년이 흘렀지만 그날의 기억은 생생하기만 할 터.

“사고를 떠올리지 않아요. 자꾸만 내 기억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노력하죠. 옛날 생각하면 뭐 해요. 그런다고 잃어버린 팔이 와서 달라붙는 것도 아니잖아요. 지금은 거의 잊어버렸어요. 그냥 ‘팔이 하나 없어서 불편하구나’라고 생각하는 정도예요.”

왼손으로 구두 만들기까지 5년여 걸려
사고 이후 마음의 평안을 되찾기가 쉽지 않았을 남궁정부 소장. 하지만 그가 마음을 다잡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그는 이듬해인 1996년 6월부터 장애인을 위한 구두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생전 처음 왼손으로 구두를 만들기 시작했을 땐 옷이고 손이고 모두 본드투성이였어요. 왼손을 자유자재로 놀릴 수 있게 되기까지 4~5년 걸렸죠.”

남궁정부 소장은 맨 처음에는 아이들을 위한 교정 신발을 만들었다고 떠올렸다. 그 당시 모두 세 사람이 일했고, 열심히 일해봤자 일주일에 고작 신발 2~3켤레 만드는 게 전부였다. 12년이 지난 지금은 당뇨 신발, 소아마비 보조 신발. 무지외반용 신발, 맞춤형 신발, 의족용 신발, 평발용 신발과 깔창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직원도 15명으로 늘었다. 신발을 만드는 모든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므로 생산량은 많지 않다. 신발 한 켤레를 만드는 데 보통 일주일에서 열흘이 걸린다.

“장애인 구두를 만들고 처음 2년 동안은 돈을 못 벌었어요. 벌지는 못하고 쓰기만 했죠. 아내가 밖에 나가 벌어온 돈, 남한테 빌려온 돈으로 내 뒷바라지를 해줬어요. 그러다 결국 이혼하자는 말까지 나왔죠. 가만 생각해보니 직원들 월급 제대로 준 게 5년밖에 안 됐네요.”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지 않았을까? 남궁정부 소장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는 것. 원래부터 낙천적인 성격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장애인의 마음을 진심으로 헤아렸기 때문이리라.

“만든 지 10년이 다 된 신발을 수선해달라고 갖고 오는 장애인들이 있어요. 그 신발을 벗으면 꼼짝을 못하니까, 10년을 신어 헤진 신발이라도 수선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얼마나 형편이 좋지 않았으면 이렇게 되도록 신었을까’ 생각하면 안타까울 뿐이에요.”

남궁정부 소장이 만든 장애인 구두는 무려 5만 켤레를 웃돈다. 그 구두의 주인공을 모두 기억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왼발은 발목이 두껍고, 오른발은 7cm나 짧던 한 여성을 떠올렸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보이던 그녀에게 구두 값을 받은 게 잘못이었다.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이에 그녀가 집 안에서 신을 수 있는 실내화, 여름에 신어도 덥지 않은 신발 등을 만들어 보내주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그녀의 친정 엄마가 찾아와 고맙다는 말을 했다고.

“장애아를 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기는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에요. 나도 사고로 오른팔을 잃기 전까지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마음, 장애아를 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장애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을 보며 마음이 아프거나 한 기억은 없어요. 하지만 지금 제 눈에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만 보여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인 거죠.”

40년 넘게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던 여자가 구두를 신고 언니와 함께 산책할 수 있게 된 경우도 있었다. 결혼식을 앞둔 장애인 신부의 구두를 만들었던 일, 발에 맞는 신발이 없어 천조각으로 발을 감싼 채 맨땅을 걸어 다녀야 했던 사람에게 구두를 마련해준 것도 기억 저편에 오래도록 자리하고 있다.

잡념 생기면 ‘환상통’ 생겨, 일이 보약이다!
인터뷰 당일, 세창정형제화연구소에는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불편한 발 때문에 혼자서 걷기 힘들다는 한 할머니는 가족들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발이 편치 않을 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운 중년 남성도 여럿 있었다. 지난번에 맞춘 동생의 구두를 찾으러 왔다는 젊은 여성도 눈에 띄었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남궁정부 소장의 구두가 얼마나 큰 힘이 될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세창정형제화연구소를 찾은 사람들은 우선 신발과 양말을 벗어야 한다. 발의 상태에 따라 족문을 떠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이를 꺼린다.

“장애를 가진 아픔은 같아요. 나는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의 마음을 바로 읽을 수 있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감추려고만 해요. 그래서 나에게조차 신과 양말을 벗은 자신의 발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 거예요. 그런 모습을 보면 마음이 많이 아파요.”

입자가 고운 스펀지에 발을 얹고 꾹 누르면 발의 형태가 그대로 드러난다. 그 뒤 석고를 뜨고, 패턴을 만든다. 여기까지가 남궁정부 소장이 하는 일이다. 패턴을 가죽 원단에 대고 재단하고, 재단한 원단 조각을 접착하고 봉제하는 일 등 패턴을 만든 이후 공정은 바로 옆 공장에서 각 분야 전문가들이 하고 있다. 물론 그 모든 공정을 체크하는 건 남궁정부 소장의 몫이다.

일흔을 앞둔 나이에 하루 종일 고개 숙이고 일하는 것이 힘들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남궁정부 소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어 보였다.

“구두 제작에서 패턴 만드는 일이 가장 중요해요. 그 일은 나밖에 못하기 때문에 내가 일을 하지 않으면 진행이 안 되죠. 게다가 나는 손을 놓고 있으면 아파요. 나처럼 몸의 일부가 없는 사람들은 환상통이라는 게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환상통 때문에 진통제를 먹어요. 진통제로 안 되면 마약까지 손을 대구요. 난 진통제도 안 먹어요. 나에게는 일이 보약이거든요.”

얼마 전부터는 남궁정부 소장의 막내아들 남궁한협씨(36)가 아버지와 함께 일하고 있다. 자영업을 하던 남궁한협씨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장애인을 위한 구두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

“장애인을 위한 구두 만드는 일은 잘되든, 안 되든 없어져서는 안 되잖아요. 내가 힘들어하니까 보다 못한 아들이 돕겠다고 나선 거예요. 지금은 공장에서 일을 배우고 있어요. 우선 신발을 어떻게 만드는지 그 전 과정을 다 배워야 해요. 그래야 최종적으로 패턴 만드는 일을 할 수 있거든요. 일 배우려면 아직 멀었어요.”

그래도 막내아들 이야기를 하는 남궁정부 소장의 얼굴이 밝다. 자신의 뒤를 잇겠다고 맘먹은 아들이 기특할 수밖에. 아버지와 아들, 모두 ‘장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구두 제작 기술 배우는 장애인 위한 기숙사 짓고 싶어
자신이 만든 구두를 신은 장애인들이 “신발이 정말 좋다”고 말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남궁정부 소장. 하지만 속상할 때도 많다. 특히 예쁜 구두를 원하는 여성을 볼 때 그런 마음이 크다.

“발에 장애를 가진 여성의 경우 예쁜 구두를 원하는 분이 많아요. 하지만 예쁜 구두를 못 만드는 게 아니라 만들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 사람의 발에 맞추면 투박한 구두가 될 수밖에 없는데….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한때는 디자인이 예쁜 구두를 몇 개 만들어 진열해놨었지만 지금은 아예 없애버렸답니다.”

의료보험 혜택에 관한 불만도 있다. 올 4월 22일부터 장애인을 위한 구두 구입에 의료보험이 적용됐다. 이로 인해 35~40만원 하는 구두 한 켤레를 사면 기준가의 80%를 환급받을 수 있다. 장애인 구두의 기준가가 22만원이니 사람들은 17만6천원을 환급받는 것이다. 기준가가 턱없이 낮은 게 문제다. 기준가가 더 높게 책정돼야 장애인이 더 많은 혜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혜택도 한 사람당, 2년에 한 번뿐이다. 세상에 신발을 2년에 한 켤레 사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남궁정부 소장은 “그 혜택이 최소한 1년에 한 번까지는 주어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남궁정부 소장은 장애인 구두 만드는 일을 하다 보니 자꾸만 해야 할 일이 떠오른다고 고백했다. 그는 모든 일을 동시에 할 수는 없으니 우선은 두 가지에만 집중할 예정이란다.

“먼저 장애인 구두 만드는 기술자를 키우는 양성소를 만드는 일이에요. 이왕이면 장애인이 많이 배웠으면 좋겠어요. 현재 우리 공장에도 장애인 네 분이 일하고 있거든요. 그러기 위해서는 장애인이 배우면서 머물 기숙사가 필요해요. 불편한 몸으로 매일 출퇴근하기는 너무 힘들기 때문이죠. 또 하나는 각 도마다 지점이 한 군데씩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지방에 사시는 분에게도 A/S를 빨리 해줄 수 있을 테니까요.”

한편, 남궁정부 소장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그는 “장애가 있다 해도 빨리 털고 일어나라”고 강조했다. 장애를 입기 전을 생각하다 보면 자꾸 움츠러들고, 우울증만 심해지기 때문. 그는 “장애는 일반인보다 조금 불편한 것일 뿐”이라며 “남들 1시간 할 거, 나는 3시간 하면 된다고 생각하라”고 덧붙였다.

남궁정부 소장은 4월 말 8박 9일 일정으로 히말라야 원정에 나섰다. ‘KBS 2007 희망원정대’의 구성원으로 네팔 히말라야 중앙부에 자리 잡고 있는 랑탕의 칸진리봉 등정에 나서는 것이다. 그의 또 다른 도전이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더 많은 장애인에게 꿈과 용기와 희망을 안겨줄 수 있을 테니.

글 / 김민정 기자 사진 / 이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