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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장서 수능 책 찾는…나는 기구한 99년생 고3 입니다 /퍼온글

솔리스톤1 2017. 11. 17. 13:25

나는 세기말에 태어난 99년생 토끼띠, 대한민국 고3이다.

 

오후 8시30분에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나왔다. 결전의 수능을 위해 지난주부터 '오후 9시 취침'을 지켰다. 뉴스를 보던 형이 말했다. "야 어떡하냐. 포항 지진으로 수능 1주일 연기됐네."






15일 수능 시험 연기 결정을 알린 뉴스 화면. [독자 제공]

형이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다. 내 눈으로 본 뉴스도 믿기지 않았다. 영화 '트루먼 쇼'가 생각났다. '이건 장난일 거야. 말도 안 돼.' 만감이 교차했다.

 

"에구, 소고기뭇국은 그냥 내일 아침에 먹어야겠다."

 

내 수능시험 때문에 하루 휴가를 낸 엄마도 정신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엄마는 수능 날 내 점심 도시락으로 내가 좋아하는, 속이 편한 소고기뭇국을 냉장고에 넣어 두셨나 보다. 시금치도 데치시던 엄마의 말을 듣고서야 현실이 느껴졌다. 엄마는 휴가를 미리 써 다음 주 수능에는 반 차를 내야겠다고 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학교 선생님은 우리가 태어난 해, '밀레니엄 버그'란 걸 걱정했다고 했다. 컴퓨터가 2000년 이후의 연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컴퓨터망이 마비되고 사회적 혼란이 찾아올 거라는. 믿기지 않지만 그런 걱정을 하는 뉴스가 쏟아졌다고 한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 한두 해 동안은 'IMF 사태'라는 시기였다고 한다. 당시 은행원이던 큰아버지는 "책상을 빼는 동료들을 보며 조마조마해 했다"고 말한다. 그러니 취업 잘되는 공대, 아니면 공무원이 최고라는 잔소리를 매년 명절 반복하신다.

 

2002년 월드컵은 너무 어렸을 적 일이라 기억이 없다. 국가대표팀이 4강에 진출했었다니. 기적 같은 일이다. 월드컵에 관한 내 첫 기억은 5학년 때, 2010년 남아공 월드컵 16강 진출이다. 우루과이에 패한 16강 전을 밤늦게 아빠랑 같이 봤다. '반지의 제왕'이었다는 안정환은 우리 세대에는 그저 예능감 있는 아저씨일뿐이다.



[연합뉴스]



참, 2009년 4학년 때는 전국적으로 신종플루가 유행했다. 이틀 동안 학교에 가지 않았다. 초등학생이 가장 전염되기 쉽다고 했다. 기다리던 가을 운동회는 취소됐다. 몇 주 뒤에는 수련회가 취소됐다. 6학년 형들의 경주 수학여행도 취소됐다.

 

그해 한 번이라도 수업을 쉰 학교는 전국 7262개(학년ㆍ학급 휴업 포함)로 전체 초ㆍ중ㆍ고교의 39.9%였다(교육과학기술부 ‘교육기관 신종플루 대응백서).

 

우리는 초딩 때 학교에서 역사를 제대로 못 배웠다. 우리에겐 6학년 때 역사 교육이 시작되는 '7차 교육과정'이 적용됐다. 그런데 6학년이 되니까 5학년 때 역사를 배우는 '2007 개정 교육과정'으로 바뀌었다.

[연합뉴스]



그다음에 비하면 여기까지는 그래도 평탄한 시절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인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다.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5월 예정된 제주도 수학여행을 목이 빠지라 기다렸건만, 나의 첫 수학여행은 사라졌다. 그때 '99년생은 왜 이럴까'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불길하다는 미신이 있는 아홉수(9)가 두개나 겹쳐서일까. 이런 한심한 생각도 했던 것 같다.

 

2015년,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메르스(MERS)가 유행했다. 그해 5월 20일 첫 확진자가 나온 이후 환자는 186명까지 급증했고, 36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5월 소풍이 취소되는 건 이젠 뉴스도 아니었다. 내 멘탈이 그동안 점점 강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휴~.

 

2017년 드디어 고등학교 3학년이 됐다. 하필 내가 고3일 때 사상 최장기 추석 황금연휴가 왔다. 시골 할머니 댁도 못 가고 꼼짝없이 독서실에 나갔다. '진짜 한 달만 참으면 된다. 수능만 끝나봐라'는 생각 밖에 안 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 11월이다. 이틀 전 점심시간, 친구 하나는 밥을 먹다가 "아, 수능 1주일만 연기되면 다 1등급 찍을 각인데"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응, 아니야~"라며 비웃었다.



온라인 커뮤니티 댓글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그 멍청한 말이 현실이 될 줄이야. 경북 포항에서 지진이 났다. 규모 5.5로 건물에 금이 가고 다친 사람들이 나왔다. 수능시험도 연·기·됐·다. 헐.

 

"초딩, 중딩 때 수학여행 한 번도 못 가고, 수능까지 연기되냐. 99년에 태어난 게 무슨 죄냐 진짜." 단체 메시지 방에 친구들의 하소연이 쏟아졌다.

 

다시 수능 D-7이다. 학교 뒤 쓰레기장으로 책 버리러 가지 않은 게 '신의 한 수'가 됐다. 뉴스를 보자마자 학교로 뛰어가 버린 책을 찾으러 간 친구도 여럿이다.



토끼띠 이달의 운세. [네이버 캡쳐]




"그동안 공들여 이루어 놓은 많은 것을 허망하게 잃기 쉬운 운수입니다.…겸허한 마음과 자세가 요구될 것입니다."

 

친구들이 단체 메시지 방에 올리는 토끼띠 운세다. 1999년생 토끼띠, 나는 대한민국 고3이다. 저주받았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다음주 수능에 부정탈까봐.

 

여성국 기자 yu.sungkuk@joongang.co.kr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 올라온 글 등을 1999년생 고3학생의 독백 형식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출처http://hub.zum.com/joongang/166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