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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無所有) / 법정스님.무슨 재미로 살까 싶다.

솔리스톤1 2010. 4. 10. 17:56

무슨 재미로 살까 싶다 - 법정

무슨 재미로 살까 싶다.
책이 있어 말벗이 되고 때로는
길을 인도하는 스승이 되어 준다.
그리고 차를 마시면서 생각을 가다듬는다.
사람은 책을 읽어야 생각이 깊어진다.
좋은 책을 읽고 내 영혼에 불이 켜진다.
읽는 책을 통해서 사람이 달라진다.
깨어 나고자 하는 사람은 항상 탐구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배우고 익히는 일에 활짝 열려 있어야 한다.
독서는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탐구의 지름길이다.
그 누구를 가릴 것 없이,
배우고 찾는 일이 멈추면 머리가 굳어진다.
머리가 굳어지면 삶에 생기와 탄력을 잃는다.
생기와 탄력이 소멸되면 노쇠와 죽음으로 이어진다.
옛 선인들은 고전을 읽으면서 인각학을 배웠다.
자신을 다스리고 높이는 공부를 했던 것이다.
먼저 자신의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하도록 심신을
닦고 나서 세상일에 참여했다.
고전에서 배우고 익힌 소양으로 인간이 지녀야 할
몸가짐과 품위를 닦았던 것이다.
현재와 과거를 물을 것 없이
말끝마다 개혁을 내세웠던 역대 정권 아래서
공직자들의 부정과 부패와 비리가 하루도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한 마디로 그들이 일찍이 인간학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다운 자세와 품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돈의 유혹에 꺾이고 만 것이다.
인간 형성의 터전인 학창시절에
고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는데 잘못된,
크게 잘못된 이 땅의 입시 위주 교육제도 때문에
인간의 윤리관을 이룰 수 없게 된것이다.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없애려면 검찰 당국에
수고를 끼칠 것 없이 인류의 지혜인
고전을 배우고 익혀 개개인이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공부부터 해야 한다.
따라서 공직자를 채용하는 시험에서도 반드시 고전에
대한 이해가 출제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 영조 때 사람, 유중림이 지은 <산림경제>중
'독서 권장하기'에 이런 글이 실려 있다.
'글이란 읽으면 읽을수록 사리를 판단하는 눈이 밝아진다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도 총명해진다.
흔히 독서를 부귀나 공명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독서의 진정한 즐거움을
모르는 속된 무리이다.'
송나라 때의 학자 황산곡은 말했다.
'사대부는 사흘 동안 책을 읽지 않으면
스스로 깨달은 언어가 무의미하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기가 가증스럽다.'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듯이
사람은 정신의 음식인 책도 함께 받아 들여야 한다.
1년 365일을 책다운 책 한권 제대로 읽지 않고
지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삶은 이미 녹슬어 있다.
옛글에 또 이런 구절이 있다.
'어릴 때부터 책을 읽으면 젊어서 유익하다.
젊어서 책을 읽으면 늙어서 쇠하지 않는다.
늙어서 책을 읽으면 죽어서 썩지 않는다.'

 

무소유 (無所有) / 법정스님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궁색한 빈 털털이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가 있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이것은 소극적인 생활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우리가 만족할 줄 모르고 마음이 불안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불안하고 늘 갈등 상태에서 만족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의 한 부분이다.
저마다 독립된 개체가 아니다. 전체의 한 부분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의 한 부분이다. 
세상이란 말과 사회란 말은 추상적인 용어이다.
 
구체적으로 살고 있는 개개인이 구체적인 사회이고 현실이다.
우리는 보이든 보이지 않든, 혈연이든 혈연이 아니든
관계 속에서 서로 얽히고 설 켜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이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어려운 일도, 어떤 즐거운 일도 영원하지 않다.
모두 한때이다. 한 생애를 통해서 어려움만 지속된다면 누가 감내하겠는가.
다 도중에 하차하고 말 것이다. 모든 것이 한때이다. 좋은 일도 그렇다. 
좋은 일도 늘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러면 사람이 오만해진다.
  
어려운 때일수록 낙천적인 인생관을 가져야 한다.
덜 가지고도 더 많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전에는 무심히 관심 갖지 않던 인간관계도 더욱 살뜰히 챙겨야한다.
 
더 검소하고 작은 것으로써 기쁨을 느껴야 한다. 우리 인생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어떤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일이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이런 어려운 시기를 당했을 때 도대체 나는 누구지.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직위나 돈이나 재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써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따라서
삶의 가치가 결정된다. 잡다한 정보와 지식의 소음에서 해방되려면
우선 침묵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침묵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는 그런 복잡한 얽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내 자신이 침묵의 세계에 들어가 봐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일상적으로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하는가. 의미 없는 말을 하루 동안 수없이 남발하고 있다.

 

친구를 만나서 얘기할 때 유익한 말보다는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말은 가능한 한 적게 하여야 한다.
한 마디로 충분할 때는 두 마디를 피해야 한다.
 
인류 역사상 사람답게 살아간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침묵과 고독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끄러운 세상을 우리들 자신마저
소음이 되어 시끄럽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열심히 찾고 있으나,
침묵 속에 머무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발견한다.
말이 많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 간에 그 내부는 비어있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지 못했던 탓으로  -작자 미상-
내 곁에서 사라지게 했던 사람들

한때 서로 살아가는 이유를 깊이
공유했으나 무엇 때문인가로 서로를 저버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

관계의 죽음에 의한 아픔이나 상실로 인해
사람은 외로워지고 쓸쓸해지고
황폐해지는 건 아닌지

나를 속이지 않으리라는 신뢰
서로 해를 끼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주는
사람이 주변에 둘만 있어도 살아가는 일은
덜 막막하고 덜 불안할 것이다.

마음 평화롭게 살아가는 힘은 서른이 되면
혹은 마흔이 되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내 아픔과 기쁨을 자기 아픔과 기쁨처럼
생각해주고 앞뒤가 안 맞는 얘기도 들어주며
있는 듯 없는 듯 늘 함께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사람들만이 누리는 행복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것이 온전한 사랑이라는 생각도
언제나 인연은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살았더라면
그랬다면 지난날 내 곁에 머물렀던
사람들에게 상처를 덜 줬을 것이다.

결국 이별할 수 밖에 없는 관계였다 해도
언젠가 다시 만났을 때
시의 한 구절처럼 우리가
자주 만난 날들은 맑은 무지개 같았다고
말할 수 있게 이별했을 것이다.

진작,
인연은 한 번 밖에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살았더라면